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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Aug 11. 2021

치사랑은 있다.

무엇에 골이 났는지 내 전화를 도통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

단체 톡방에서는 대답도 곧잘 하면서 전화는 받지 않는다. 사실, 무엇에 골이 났는지는 안다. 다만 납득이 되지 않을 뿐이다. 자신의 말에 호응해주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좋아할 때는 언제고 조금이라도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그 길로 뒤돌아 서 버린다.


말복이었다.

그녀 생각이 났다. 남편과 삼계탕은 끓여 먹으려나? 전화를 했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뾰족한 마음이 솟아오르고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그런데 자꾸 신경이 쓰이는 속내는 무엇인가.


결국 아침 일찍 일어나 팥을 삶아 고물을 만들었다. 멥쌀과 찹쌀을 1:1로 섞고 말려둔 호박고지도 꺼냈다. 그녀가 좋아하는 시루떡을 하기 위해서였다. 내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고 얼굴도 보기 싫겠지만 시루떡 앞에서는 말랑말랑해질 그녀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떡을 하면서도 온통 그녀 생각뿐이라 그녀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복날인데 삼계탕은 드셨어요?"

"그럼~ 잘 먹고 있지."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마나님이 제 전화를 안 받으시길래..."

"아무 일 없지. 왜 전화를 안 받아? 둘이 싸웠어?"

"싸우긴요."

"잘들 좀 지내~~"


맛있는 냄새가 폴폴 나는 시루떡을 머리에 이고, 아니 큼직한 가방에 넣어 식을세라 곧장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집에 도착하기 1분 전,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었다. 거짓말 안 보태고 10번은 벨이 울렸을까, 최대한 기운 없는 목소리로 그녀가 답했다.

집 앞 임을 고지하고 바로 올라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그녀는 현관문 앞까지 나와 있었다. 용의주도한 나는 서로의 어색한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음 스케줄을 마련해두었다. 잠시 앉아 담소라도 나눌 시간을 없애 버린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잠깐 커피라도 마시고 가라고 잡을 그녀였다. 어디 가는지, 왜 가는지를 꼬치꼬치 캐묻고 아쉬움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그녀.


하지만 토라졌을 땐 얘기가 다르다.

싫었다. 냉랭할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와 차갑게 식은 표정을 견뎌내기가.

겁이 났다.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차가운 벽을 치고 허무하게 되돌아올 것이.




*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기는 하여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기는 좀처럼 어렵다는 말.

* 치사랑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을 사랑함.
                                                                                                           표준국어대사전


"내리사랑은 있지만 치사랑은 없다."라는 말을 나는 부정한다.

내리사랑도 있지만 치사랑도 있다. 내리사랑이 없는 경우도 존재하고 치사랑이 없는 경우도 있다. 때론 치사랑이 내리사랑을 넘어서기도 한다. 어찌 됐든 치사랑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꼴은 못 보겠다.


사랑받아 마땅할 아이 하나가 또 세상을 떠나갔다.

애간장이 탈 정도의 모성을 모든 엄마에게 기대하는 게 아니다. 책임감이든 의무감이든, 최소한의 양심이든 그게 무엇이든 간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줄 테니 제발 좀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내리사랑은 받아보지도 못했을 아이, 아니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조차 몰랐을 그 아이는 엄마라는 사람이 자신을 외면하고 버린 그 순간에도 '엄마'를 부르며 울부짖었을 것이다.

깜깜한 방 안에서 배는 고프고 두려움에 이가 덜덜 떨리던 순간에도, 쓸쓸히 외롭게 죽어가던 그 순간에도 힘겹게 엄마를 불렀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당신만을, '엄마'라고 부를 유일한 당신만을 기억하고 사랑하겠노라 다짐했을 것이다.


어쩌면 '내리사랑은 있지만 치사랑은 없다'는 말은 권위주의적이고 전근대적인 가족관념에 기대 부모들이 만들어 낸 말일 것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한없이 위대한 것으로 포장해버려 성역화해 버렸다. 부모가 자식에게 어떤 짓을 해도 감히 대들지 못하게, 감히 의심하지 못하게, 감히 부정하지 못하게.


치사랑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겠지.

부모들의 이기심과 무관심이 자식의 치사랑으로 인해 만천하게 드러날 것이 두려웠겠지.


애당초, 사랑에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라는 방향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손 아랫사람의 손 윗사람을 향한 사랑, 윗사람의 아랫사람을 향한 사랑이라는 말이 웬 개떡 같은 말이람?


그녀를 위해 떡을 쪄 한달음에 달려온 나를 보고 그녀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무색하게 그녀는 웃었다. 문간에 서서 떡을 받아 든 그녀는 예상대로 함박웃음이 되었으나 그것이 꼭 떡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더운데 떡은 왜 했어? 힘들게..."

"복날이라... 삼계탕은 드셨다고 해서..."


치사랑을 전하고 내리사랑을 받아왔다.

아니다.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아왔다.


작은 아이를 위한 백설기와  엄마를 위한 호박고지 시루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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