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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Oct 25. 2021

'오징어 계'임

오징어 필요하신 분~~
저요~ 4마리
저두 4마리요~
혹시 여유 있으면 나는 8마리
난 이번에는 패스. 요즘 밥을 잘 안 함.
난 2마리


두어 달에 한 번씩 선동 오징어 한 박스를 주문한다.

크기에 따라 개수는 다르다. 8.5kg 한 박스에 큰 놈은 25마리, 중간 사이즈는 35마리 정도. 혼자 주문해서 소화하기에는 버거운 양이라 오징어를 주문하면 동네 친구들과 나눈 것이 수년째다.


몇 년 전, 큼지막하고 싱싱해 보이는 생물 오징어를 두 마리 사온적이 있다. 저녁 준비를 하려고 낮에 사 온 오징어 팩을 열었는데, 오! 마! 나!

작은 벌레들이 잔뜩 기어 다니고 있는 게 아닌가. 구매처에 전화해보니 갖고 오면 환불해준다고 했다. 니베린 촌충이라 불리는 놈들로 생물오징어라면 어디에서 사도 있기 마련이라고 했다. 숫자가 보기 거북할 정도로 많지 않다면 크게 문제 될 것 없다고...

거북했다. 못 봤으면 모를까 알고는 못 먹을 양. 즉시 환불을 하고 이후로는 생물 오징어를 사지 않았다.


그런데, 오징어는 밥상에서 참 그리운 음식이었다.

데쳐 놓으면 초장 하나로 근사한 밥상이 되었고 뻘겋게 볶으면 쓱쓱 밥 비벼 먹기 그만이었다. 된장 풀어 무와 함께 끓여낸 시원한 오징어국은 또 어떠한가.

작은  아이가 좋아하는 충무김밥에도 오징어는 메인이다.


냉동상태에서는 벌레들이 수시간 내에 죽는다고 했으니 고민할 것 없이 선동 오징어를 구입해야 했다.

이제 문제는 가격.

몇 년 새 오징어 가격은 몇 배가 올라 두 마리만 해도 만원 안팎이었다. 찌고 끓이고 볶아먹으려면 서너 마리는 사야 하는데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산지에서 바로 보내주는 선동 오징어를 알아보았고 주기적으로 주문하게 된 것이다. 직거래이다보니 가격도 괜찮았다. 마리당 2,500원에서 3,500원 사이.


오징어가 도착한 날이면 하나 둘 우리 집으로 모여든다.

배에서 잡아 올린 즉시 스티로폼 박스에 넣은 채 꽝꽝 얼어 그대로 배송되는 오징어는 집에 도착한 후에도 한참이 지나야 떼어낼 수 있다. 적어도 두세 시간은 지나야 한다. 그 시간을 우리는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화투를 친다. 오징어를 받기 위해 모인 건지, 화투를 치기 위해 되지도 않는 이유를 만들어낸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겉만 살짝 녹은 오징어를 하나씩 떼어소분한다.


오징어를 나누어 받은 날, 집집마다 저녁 반찬은 오징어 요리다.

싱싱한 놈이라며 내장째 쪄서 통째로 잘라 고소하게 먹는 집.

무 넣고 국 끓여 밥 말아먹었다는 집.

파, 양파, 당근, 고추에 채 썬 오징어 넣고 파전을 부쳤다는 집.

매운 양념으로 볶아 밥에 비벼먹었다는 집.

라면에 오징어 넣고 끓여 간단히 해결했다는 집.

온 동네에 오징어 냄새가 진동할 듯 인증사진이 넘쳐난다.


10년째 한 동네를 함께 지키고 있는 우리를 묶어주는 것 중 하나가 오징어다.

처음엔 같은 반 아이들의 학부모로 시작한 모임이었다가, 여행을 함께 다니는 모임으로 발전했다.

여행지에서 맛 들인 화투를 틈틈이 치는 모임으로 변질되었는데 그것이 더 끈끈하고 질긴 인연으로 만들어줬다. 오징어 한 박스를 나눌 사람이 되었고 서로의 아픔과 고민, 기쁨과 행복을 나누는 이웃이 되었다.


계 契
발음 [ 계ː ] [ 게ː ]
명사
주로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받거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만든 전래의 협동 조직. 낙찰계, 상포계, 친목계 따위가 있다.

매달 2만 원씩의 돈을 함께 모으고 있으니 계모임도 하는 사이다.

그 돈으로 돌아가며 생일파티도 해주고 서로의 애경사를 챙긴다.

오징어 게임 대신 화투 게임을 즐기며 오징어를 나누는 우리는, '오징어 계' 임~~~


살짝 녹기를 기다렸다가 네마리씩 소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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