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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Dec 28. 2021

고작 죽 한 그릇 끓이면서...

남편은 간이 크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 왔다.

그렇게 커질 때까지 판을 깔아놓은 내 탓이 크니 이제와 남편만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교육자원봉사센터 회의가 있어 가는 길, 남편에게 톡이 왔다.

"오전에 볼일 끝나면, 오후에는 뭐해?"

싸늘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바로 전화를 했다.

"뭐냐! 단도직입적으로 빨리 말해라!"

"벌써 눈치챘어?"

"그니깐, 빨리 말해라. 무슨 일을 시키려고 그러냐?"

평소와는 달리 세게, 예의 없이 몰아붙이는데도 남편은 그저 아내의 농담, 애교쯤으로 받아들였다. 이것도 버릇을 잘못들인 내 잘못이다...

"나... 죽 한 그릇만 끓여주라."

"죽? 왜? 어디 아파?"

"아니... 그게 아니고..."


얼마 전 캐나다에 사시는 아주버님이 귀국하셨다. 코로나로 2년 동안 못 들어오시다가 치질 수술이 급하셔서 장기 휴가를 내고 오셨고 오늘이 수술 날이었던 것.

병원에서, 오늘 하루는 죽을 드셔야 하는데 개인이 준비해 들어오시라고 했단다. 그래서 아주버님은 아침 입원 길에 편의점에 들러 인스턴트 죽 하나를 사들고 가셨다는 것이다. 20년 전 이혼하고 여태 혼자 사는 형, 따뜻한 죽 한 그릇 챙겨줄 이 없는 쓸쓸한 형의 입원 길이 마음에 걸렸던 남편은 자신의 간을 담보로 아내에게 죽 한 그릇을 부탁한 것이었다.


"알았어... 전복죽 끓여드리면 될라나?"

"아... 형 입맛이 좀 까다로워서... 전복은 안 먹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야채죽 끓일까?"

"소고기... 야채죽은 안될까?"

"아오!! 알았어!"

"그리고..."

"설마 장조림?"

"허허허.... 그리고..."

"설마 물김치 말하는 거야?"

"어... ㅎㅎ 우리 집에 있지 않나?"


그 마음을 내칠 수 없던 나는 귀가하는 길에 동네 정육점에 들러 한우 한 덩이를 샀다. 죽을 가지러 오겠다며 남편이 걸어놓은 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 고기의 핏물을 빼고 쌀을 불렸다. 남편의 부탁대로 몸은 움직이고 있는데 마음속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

모든 재료 품은 죽을 한 바퀴 젓는데 머릿속이 시끌시끌거린다.

"어머~~ 아주버님 죽을 왜 쌤한테 주문해요~?"

"아니, 죽집 죽이 얼마나 잘 나오는데, 장조림은 또 얼마나 맛있고요?"

"쌤 남편분, 쌤이 다 해줄걸 알고 그러시네~"

회의 중 무심결 뱉은 넋두리에 흥분한 선생님들의 한마디였다.


또 한 바퀴 젓는데 이번에는 마음속에서 시끌거린다.

'죽 하나 쑤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심란해하니?'

'이왕 하는 거 기분 좋게, 정성껏 해드리면 그만이지.'

'혼자된 형 생각해주는 남편 마음이 얼마나 착하고 깊니. 그 마음 다 너한테 쏟을 거야.'


2주 전, 마트에서 호주산 갈비가 행사한다기에 1kg을 사다가 갈비찜을 했다. 세 식구가 한 끼 먹으면 딱 좋겠다 싶었다. 먹음직스럽게 완성된 갈비찜을 본 남편은 이웃에 혼자 사는 대학 동창과 귀국 후 자가격리 중인 아주버님에게 조금씩 나눠주고 싶어 했다. 자기는 안 먹어도 좋다고 했다. 그 마음이 존경스러워 갈비찜 한 그릇, 보쌈김치 하나씩을 포장해 배달을 보냈다.


그런데 입원하는 아주버님께 드릴 죽을 쑤고 있는 나는, 측은지심과 괜한 심술 사이에서 시끄러운 마음을 품고 있으니, 그게 참 창피하고 속상하다. 고작 죽 한 그릇 끓이면서 말이다.


몇 년 전 시댁에서 등갈비 구이를 해드렸을 때 아주버님은 감탄을 하며 말씀하셨다.

"와~ 재수 씨, 가족들이 너무 좋아하겠어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으니까요. 저희 집은요, 이런 재미없이 살아요~"

온 식구가 저녁 시간에 모여 방금 끓인 찌개를 가운데 두고 시끌벅적, 화기애애한 저녁을 맞은 적 없던 아주버님의 말씀이 참 서글던 기억. 그게 지금 날게 뭐람...

퇴근길 따뜻한 밥 한 끼의 온기를 누리지 못했던 아주버님에게, 가족이니까 내가 조금이라도 온기를 나눠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뭐람...

그러면서도 뾰로통한 마음을 달래고자 글을 끄적이고 있을게 뭐람...

고작 죽 한 그릇 끓이면서...



오늘 글은, 브런치 생활 처음으로 댓글창을 닫아놓으려 합니다.

순수하지 못한 마음이 탄로 나 부끄러워 그렇고,

행여나 간 큰 남편에게 향할 손가락질을 막아주기 위함입니다.

간이 큰 만큼 마음도 큰 사람입니다.

그런 남편과 사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

5시에 오겠다고 해놓고는 4시 반에 와서 빨리 죽 내놓으라며 제 뒤꽁무니를 쫓아다닙니다.

오늘 저녁은, 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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