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식!

전역까지 D-501

by 늘봄유정
사랑하는 가족한테
오늘은 8월 29일 일요일 후반기 교육 1주 차 마지막 날이야. 우표가 두 개 정도 남아서 쓰려고 편지 쓸게.
헌병이라 그런지 다른 후반기 교육대는 편하다는데 여기는 군기가 좀 있어. 그래도 훈련소보다는 괜찮은 듯. 훈련은 특수부대라 그런지 빡세긴 한데 재밌어. 문제는 교육생 250명 정도가 있는데 한 명이 잘못해도 연대 책임이라고 다 같이 통제돼. 뭔가 진짜 군대온 느낌.
이번 주는 근접 전투 사격술이라고 이근 대위가 유튜브에서 하던 거 교육받고 내일부터 레펠이랑 패스트로프 교육받는대.

금요일에 국방부 장관 경호원 뽑는다 해서 지원했는데 면접까지 가다가 경호원은 아닌 거 같아서 안 한다 했어. 경호원은 개인정비 시간도 없고 좋은 말로 해서 경호원이지 거의 노예래. 그래서 안 한다 했어. 내일 참모총장이랑 합창의장? 경호원도 뽑으러 온다는데 그건 차출이라 어케 될지 모르겠어.
전화가 맨날 가능한데 시간도 정해져 있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전화하기가 빡세.

다들 잘 지내지? 집 가고 싶다.
빨리 훈련 끝났으면 좋겠어.
차라리 자대 가면 편한데 훈련생 신분 9주는 쫌 빡시네. 논산 훈련소 때 친구들도 정 많이 들어서 보고 싶긴 한데, 여기 생활관 애들도 다들 착해서 금방 친해졌어.
여기 들어온 지 100일 되는 날이 10월 24일인데 보통 이쯤 신병 휴가 보내준대. 근데 코로나 심해져서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술도 마시고 싶다. 담배는 많이 안 피워. 걱정 안 해도 돼. 오늘 1시에 전화할 수 있다고 해서 전화방 열리기 전에 대기 타고 있으려고.
9시마다 뉴스 틀어주는데 뉴스가 재밌더라. 오늘은 영화 보고 있어. 연평해전, 부산행 이런 거 공짜라 볼 수 있대.
할아버지 전화했을 때 살짝 울먹하신 거 같기도 하고?
다음 주에 자대 어딘지 나온대. 가까운데 걸리면 좋겠다. 부산 걸리면 진짜 사고야. 50%는 전방 간대.

아 그리고 여기 화장실에 비데가 있어. 시설은 제일 좋은 거 같아.
근데 계속 있고 싶지는 않아.


역시 편지는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받아야 제맛이구나. 저녁 준비하고 있는데 하교하던 호진이가 들고 온 깜짝 편지에 엄마는 방방 뛰었단다.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고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집 가고 싶다'는 말에서 울컥했지만 뉴스가 재미있다는 말에 한번 화장실 비데 있다고 좋아하는 거에 한번 빵 터졌다.


두서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쓴 이 편지가 엄마는 참 좋더라. 생활관에 엎드려 무슨 말을 쓸까 고민하는 네 모습이 떠올랐어. 손편지는 절대 쓸 일이 없다던 너였는데 말이지. 장병 소포에 들어있던 편지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단다.

남은 우표를 써버려야겠다는 생각에 편지를 썼다는 것도 기특하더라. 9월이면 우표값이 올라서 갖고 있는 우표는 8월까지밖에 못쓴다고 알려줬더니 그걸 잊지 않고 있던 것도 대견하고, 버려도 그만이었을 텐데 그게 아까워서 편지를 썼다는 것도 신기하더구만.


마지막 인사도 없이 툭 끊긴 편지, 그것마저도 좋더라.

뒷장에 글이 더 있나 뒤집어 보았지 뭐냐. 다음을 기약하지도 않고 흔한 마무리 멘트도 없었지만 섭섭하지 않았단다. 글에서 네 냄새가 났다고나 할까?


봉투 입구를 풀칠로 봉해놓고 그 위에 하트 스티커 세 개를 뿅뿅 박아놓은 건 또 왜 그리 귀엽던지.

널 군대에 보낸 게 아니라 유치원에 보낸 엄마가 돼버렸다. 한글을 갓 뗀 아이가 쓴 첫 편지처럼 엄마를 설레게 했고 감동을 주었지.


잘 쓴 글은 아니지만 '네가 쓴 글'이라는 그 자체로 넌 내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작가다.

짜식... 많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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