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Sep 09. 2021

변한 게 아니다.

"그 사람, 변했더라."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 우리는 말한다. 무뚝뚝하던 사람이 살가워지는 경우, 염세적이던 사람이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경우처럼 긍정적인 변화를 목격할 때는 입가에 은은 미소를 띠며 말할 것이다. 마치 내가 상대를 변화시키기라도 한 듯 흐뭇하고 흡족한 마음마저 든다.

반대의 경우도 흔하다. 친절하던 사람이 퉁명해진다거나 친밀하던 사람이  어색하게 구는 경우. 무엇이 상대를 변하게 만들었는지 원인 분석이라도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그렇게 우리는 상대의 변화에 민감하다.



수년째 공식석상에서만 두어 달에 한번 뵙는 분이 계시다. 당연히 그분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습관을 가진 분인지 잘 모른다. 오로지 몇 달에 한번 있는 회의에서 한두 시간 뵐 뿐이고 사담을 나눈 일은 전혀 없다.

그분은 늘 과묵했다. 책임 있는 자리에 계셔서 말을 아끼시는가 싶다. 때로는 눈을 감고 한참을 계셔서 잠드셨는가 지켜본 적도 있다. 꾸벅꾸벅거리지 않는 걸로 봤을 때 자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딱히 회의를 경청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졸음을 참느라 자신과의 고독한 전쟁을 치르고 계셨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다 인사말을 하게 될 때도 두서없는 말을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겨 말씀하셨다. 이 자리가 싫은 게 아니라 말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아닐까 생각했다.


그랬던 그분의 다른 면을 본 것은 며칠 전 열린 회의에서였다.

회의 안건에 대해 한 직원의 제안설명이 끝난 후 나를 비롯한 몇몇이 질의를 했다. 말이 질의지 그 제안이 나오게 된 배경부터 막대한 소요비용에 이르기까지 문제제기를 이어갔다. 이 분위기가 몹시 불만스러웠던지 그는 격양된 어조로 발언을 시작했다. 안건의 필요성과 시급성 등 전후 맥락을 빠뜨리고 설명한 직원을 향한 질타했다. 이어서 장황한 부연설명을 했다. 전에 없던 돌발 행동에 회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줌 회의였어도 회의 참석자들의 당황스러운 표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곧바로 전해져 온 카톡 메시지로 다른 참석자들의 심정을 확인했다.

"갑자기 왜 저리 변하신 걸까요?"

"그러게요? 너무 당황스러워요... 전에 없던 새로운 모습..."

"기필코 안건을 통과시키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여요."

"결연한 의지! 절대 거스를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네요."

"찍힐 것 같아서 더 이상 얘기할 수가 없어요..."


아닌 게 아니라, 문제 제기를 처음으로 한 나를 계속해서 응시하고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줌에는 쥐구멍이 없나 찾아야 했다. 단지 화면을 보시는 것일 텐데 말이다. 늘 고개를 숙이고 화면에서 반 이상 나가 있던 그가 오늘은 정중앙에서 고개를 꼿꼿이 들고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순하디 순하던 양반, 말 한마디 않고 점잖던 양반은 어디 가고 어디서 갑자기 저돌적이고 괴팍한 이가 나타난 걸까? 이 낯선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내와 부부싸움이라도 한 걸까?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변했을까?

회의가 끝나고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당사자에게 직접 묻지 않고서야 절대 구할 수 없는 답을 찾아 나 혼자 헤매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변한 게 아닐지 모른다.

사람이 변한다는 건 틀린 말일지 모르겠다.

상대가 변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어떤 특별한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내가 모르던 모습 말이다. 오래 알고 지냈어도 나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상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상대가 변했다고 편하게 해석해버린 것 아닐까.


상황과 입장이 바뀌거나 사안에 따라서 사람은 얼마든지 여러 모습을 보일 수 있다. 혹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특정 모습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들키거나 드러나면 이전의 자신과 다른 사람으로, '변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닐까.


"사람은 안 변해~"

사람이 가진 기질이나 성향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상대의 달라진 모습에 기뻐하거나 혹은 당혹스러웠다가 원래대로 돌아간 상대를 보고 실망하거나 혹은 다행스러워하며 내뱉게 된다.

그렇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들키기도 하고 잘 감추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고 가려지기도 했을 뿐이다.

다 그가 가진 원래 모습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긴 싸움의 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