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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Sep 10. 2021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입에 달고 살던 말이다. 주로, 신박한 아이디어를 낸 나를 주변 사람들이 칭찬해줄 때 겸손의 의미로 사용했다. 때로는, 새로 출시된 어떤 상품에 열광하는 세태에 '관심 끄자'며 '다 거기서 거기야~'라는 말과 함께 썼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음악, 과거의 것과 비슷한 영화를 볼 때도 무심하게 내뱉은 말.



동네에 빵집이 생겼다. 크로와상만 파는 집이라며 지역 맘 카페가 떠들썩했다. 11시와 4시에 두 번 빵이 나오는데 시간 맞춰 가도 이미 줄이 너무 길고 30분이면 동이 난다고 했다. 아는 맛이지만 앉은자리에서 세 개는 기본 순식간에 해치울 정도로 맛있다는 후기였다.

'나도 가서 줄 서볼까?' 하다가 말았다. 시간이 아깝기도 했고 크로와상이 크로와상 맛이겠지 싶어서였다.


지난 십수 년간 다양한 디저트들이 돌풍을 몰고 왔지만 1년여 만에 새로운 것들로 물갈이되곤 했다. 알고 보면 뻔한 맛인데 약간의 형태를 달리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커피 향 물씬 나고 겉보기와 달리 폭신하며 안에는 버터가 촉촉하게 남아있거나 슈크림, 초코크림 등의 필링으로 채워졌던 번.

별 모양으로 길게 뽑은 반죽을 기름에 튀겨 시나몬 설탕에 굴린 추로스. 나중엔 가운데 구멍을 뚫어 초콜릿, 생크림, 아이스크림으로 채워주기까지 했다.

소보로같이 바삭하고 고소한 빵 안에 달달한 크림이 가득 채워진 쿠키슈.

먹거리 고발 프로 때문에 가장 빨리 막을 내렸지만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인기를 누렸던 대왕 카스텔라. 가운데 크림 가득 품은 카스텔라도 인기였다.

밀가루 반죽을 납작하게 틀에 구워낸 와플. 기본도 맛있었지만 초코시럽 코팅이 되어있거나 생크림이 얹어진 것 모두 다양하게 맛있었다.

식빵에 햄 한 장, 치즈 한 장 넣었을 뿐인데 특유의 소스로 깔끔한 맛을 냈던 대만 샌드위치. 크림 듬뿍, 악마의 초코, 흑임자, 인절미 등 다양한 시도를 했다.

동그란 꼬끄 사이에 각종 필링을 채워 만든 마카롱. 상상도 못 할 다양한 재료들을 푸짐하게 사용해 안에도 넣고 위에도 장식한 뚱카롱으로 진화했다.

설탕시럽이 얇게 도포된 평범한 도넛인 줄 알았으나 입에 들어가기 무섭게 사라져 버려 앉은자리에서 3개는 거뜬했던 크리스피 ** 도넛.  장식과 필링을 다양하게 바꿔가며 출시하고 있지만 오리지널을 당해낼 수는 없다.

빵 가운데 이걸 먹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두툼한 덩어리 버터와 적당히 달달한 팥앙금이 들어간 앙버터.

달고 열량 높은 건 여타 도넛들과 같지만 더 화려하고 예쁘게, 인스타 감성을 덧입은 듯한 고가도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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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뻔한 조합들이었다. 밀가루 빵을 그냥 먹거나, 겉이나 위에 뭘 바르거나 얹거나, 속에 뭘 채우거나... 새로울 게 없는 것들이 변주를 통해 완전 새로운 것처럼 우릴 현혹했다. 크로와상 집이 새로 생겼다 해도 줄 서서까지 먹을 맛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30분 거리의 용인 다른 동네에 볼일이 있어 가게 됐는데, 마침 그곳에 그 크로와상 집이 있었다. 오픈한 지 한 달이 넘어 손님이 별로 없었다. 아는 맛, 뻔한 맛이지만 유행이라니 먹어나 보자며 들어갔다. 1개에 1000원, 10개에 9,900원. 고작 100원 깎아주면서 생색을 내는 게 맘에 안 들었지만 이미 빵을 고르고 있었다.

음... 10개를 담았는데 아직도 10개 이상의 다양한 맛들이 남아있었다. 돌이켜보니 이때 이미 난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총 20개의 크로와상을 상자에 담아 왔다. 집에 오는 차 안, 순식간에 3개를 해치웠다. 집으로 와서 다시 3개... 죄책감 따위는 느낄 새도 없었다.


뻔한 맛이었다. 새로울 것 없는 맛.

기본 크로와상 위에 시럽을 발랐거나 그 사이를 무언가로 채운 것. 하늘 아래 뻔하디 뻔한 빵 앞에서 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내 입'뿐이라는 것을...

일분일초 매 순간 리셋되어 어떤 음식이든 격하게 환영하며 진심을 다해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녹차로 입을 헹구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아도 늘 새로워진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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