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소에서만 9주를 보낸 이등병은 집에서 가까운 곳, 이왕이면 전방부대를 간절히 원했지만 인생이 어디 그렇게 원하는 대로 되던? 함안에 위치한 후방부대로 가게 된 너는 다소 실망했고 풀이 죽은 목소리로 전화했지. 그러면서 내게 신신당부하기를,
"화요일에 자대 도착이니까 화요일 오전에 휴대폰 보내줘~ 월요일에 보내면 안 돼. 자대 도착하자마자 분위기 파악도 못했는데 휴대폰 소포가 너무 일찍 도착하면 눈치 보일 것 같아서... 그런데 화요일에 보내면 추석 전에는 받겠지?"
휴대폰을 빨리 받고는 싶지만 찍히고 싶지는 않은, 바짝 쫄아있는 이등병의 모습이더라.
네가 오매불망 휴대폰과의 재회를 기다린 것은 단절됐던 외부와 소통하게 된 것에 설레어서는 아닐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소통을 위해서, 때로는 완벽한 고립을 위해서 필요했을 것이고 휴대폰이 곧 너요 네가 곧 휴대폰이었기 때문에 저리도 애절한 것이라 생각했지.
금요일 저녁, 낯선 공중전화 번호가 아니라 네 이름이 발신인으로 뜨는 전화가 울렸다. '어질고 지혜로운 아들'이라고 저장해 둔 긴 이름이 뜨자마자 나는 단숨에 전화를 받았지.
친절한 선임들, 듣던 대로 캠퍼스 같이 넓고 세련된 부대, 맛있는 밥.
엄마의 걱정을 잠재울 달콤한 이야기로 시작한 너는 본격적으로 '군인의 이야기'를 풀어놓더구나.
"우리 특임대가 이번에 승격됐다고 했잖아 엄마? 그래서 이번에 우리 사단이랑 후방 다른 사단 특임대에 있는 이등병, 일병만 모아서 707부대가 훈련받는 곳에서 훈련을 받게 됐어. 경기도 광주로 파견 가서 훈련받는데 엄청 빡센 훈련이래. 좀 걱정이 되기는 하는데, 장교 대상 교육대에서 이병, 일병이 훈련받는 건 전군 최초야. 우리가 최초라고. 상병 이상은 제대가 얼마 안 남아서 제외래. 합참의장 명령으로 내년 말까지 남아있을 이병, 일병만 훈련시킨대. 5주 동안 받는 건데 상상 이상으로 힘들대. 버티는 건 자신 있는데 어느 정도 일지 가늠이 안돼서 걱정돼. 47교장이라는 곳에서 훈련을 받을 예정인데, 파견 훈련이라서 월급도 추가로 더 받고 거기서만 살 수 있는 707부대 티셔츠를 PX에서 살 수 있대. 10장 사 올 거야. 흐흐흐."
"육군에서 '300 워리어'라고 최고 전투원 300명을 뽑는 선발대회가 있는데 우리 특임대가 이번에 뽑혔대. 선임들이 내년 대회에는 우리한테 기대한다고 해서 그 준비도 빡세게 해야 돼. 그거 뽑히면 포상도 받나 봐."
"아침에 잘 일어나냐구? 그럼~ 여섯 시 반에 딱 일어나지. 아침에 일어나면 너무 바빠. 불 켜야지, 에어컨 켜야지, 창문 열어 환기해야지, 침상 정리해야지. 밤에는 머리 대면 바로 잠들어. 나 이제 끊어야 해. 생활관 청소해야 하거든."
너는 숨도 쉬지 않고 15분을 떠들더구나. 사춘기 이후로 엄마와 이렇게 오랫동안 대화했던 적이 있을까. 아니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가 일방적으로 물으면 너는 '응', '아니'라고 대답하던 게 우리의 대화였는데, 이번에는 반대더라. 네가 군대 이야기를 무수히 쏟아내면 엄마가 "그래?", "어머나~"라는 추임새를 넣으며 듣고 있는 게 아니겠니. 유치원, 학교를 다녀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쉼 없이 떠들어대던 네 어린 시절이 생각나더구나. 어쩌면 너는 그대로였는데, 엄마가 보지 못하고 듣지 않고 있었나 보다. 네가 휴대폰을 그렇게 기다린 것도, 소통에 갈급했기 때문이었음을 인정한다.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며 네가 있는 곳이 전방보다 더 대단한 곳임을 자랑하고 싶은, 넌 영락없는 이등병이더라.
'전군 최초'라는 말이 엄마는 왜 그리 웃기던지.
처음에는, 마치 자신이 나온 부대는 군사기밀이라 말 못 한다던지, 보초를 서는데 철책으로 북한군이 내려와 담뱃불을 빌려갔다는 류의 허풍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진지한, 너무나도 진지한 너의 말을 들고 있노라니 '너는 진심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단다. 전군 최초이든 아니든 간에 매일매일이 '네 인생 최초'의 경험일 테니 말이다.
최초의 경험이 최고의 경험이 되기를 소망하는 이등병의 기대. 군대는 그렇게 이등병의 설렘과 기대를 동력으로 굴러가는가 싶었다.
"오늘은 뭐해?" "운동하고 디피 보는 중 눈치도 보고"
토요일 오후, 이제는 휴대폰을 자유롭게 쓰게 된 네게 뭐하냐고 물었더니 단 세줄로 짧고 굵게 전해온 네 대답에 아빠와 한참을 웃었다.
휴일 오후, 자신의 휴대폰으로 넷플릭스 신작 드라마를 볼 수 있을 만큼 군대는 좋아졌지만 틈틈이 곁눈질로 내무반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귀여운 이등병이 그려지더라.
네 모든 순간을 알 수는 없을 테지. 군사기밀일 테니까. ㅎㅎ
하지만 네 안에 깃든 약간의 흥분과 약간의 두려움, 또 얼마간의 그리움은 모두 느껴졌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