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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Oct 28. 2019

D-100 프로젝트
< D-62 >

사람은 '언젠가' 죽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죽을 수 있다.( 키키 키린 )               

100일 후에 죽는다고 생각하고 살면 하루가,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 <인연>, 피천득


그리워할 사람도 아니고 못 잊을 사람도 아니건만 이 수필이 생각난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일주일 전 마을교사 양성과정 시간에 디베이트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셨던 선생님께서 오늘 수업 중간 쉬는 시간에 사라지셨다. 주변 선생님들께는 몸이 안 좋아 가신다고 했다지만 난 알 수 있었다. 한 시간 강의 내내 신경 쓰여 살펴본 그분의 표정에서 느낌이 왔다. '납득이 안되셨구나...'

수업이 끝난 후 받은 문자로 확실해졌다.

"제 생각과 연결이 안 되는 부분 때문에 완전하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입니다. 끝까지 못하는 걸로 결론 내렸습니다. 그동안 감사했고 죄송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모두의 생각이 같을 수 없다. 중간에 싫어질 수도 있다. 나도 늘 그런 걸 뭘...

처음엔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다가도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가며 중도 포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뭘...

11월에 예정되어있던 소망교도소 디베이트 자원봉사도, 하고 싶지 않은 이유만을 찾는 날 발견하고는 포기했는걸 뭘...


그런데 이 공허함의 이유는 무엇일까?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이 "공부나 합시다!"라고 하는 제자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인 걸까?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선생님이 "공부는 안 하고 왜 노래만 부르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 기분일까?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어 들른 수업에서도 확신을 얻지 못하고 홀연히 사라진 그분께 '최후의 변'도 하지 못한 데서 오는 아쉬움인 걸까?

스물여덟 분의 최초 신청자 중 열다섯 분 정도 남은 상황이니 자취를 감추신 분은 이미 많건만, 유독 그분에게만 맘이 쓰인 건 왜일까?


첫 수업부터 안 오셨거나, 첫 수업 이후 안 나타나신 분들의 불만과 고민에 대해선 알지 못하기 때문일 거다. 그저 월요일 아침부터 집을 나서는 게 귀찮았을 수도 있고 궁금해서 와봤는데 시키는 게 많아서 그만두었을 수도 있다. 내 수업방식이 맘에 안 들었을 수도 있고, 그냥 내가 싫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분은 달랐던 거다.  디베이트와 마을교사에 대해 그분이 가졌던 고민의 깊이를 알기에 더 안타깝고 아쉬운 맘이 들었던 거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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