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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Nov 15. 2021

시도 본능

남편은 내게 자주 당부한다. 때로는 경고에 가깝다.

"제발 새로운 시도 좀 하지 마!"

새로운 식재료를 활용한 낯선 요리를 한다거나, 신소재로 만든 신발을 사주었을 때가 그 경우다. 

얼마 전, 롯데 신동빈 회장이 신어 화제가 된 신발 하나를 남편에게 사주었다. 국내 스타트업 기업이 폐페트병을 활용해 만들었다는 스니커즈였다. 마침 남편에게 운동화 하나 사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친환경에 가격도 괜찮고 디자인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며칠 신발을 신어본 남편의 반응은...

"이번에 당신이 산 신발! 바닥이 얼마나 미끄럽던지... 미끄러져 죽는 줄 알았어. 제발 좀! "

남편 골로 가게 할 뻔한 신발을 선물한 죄로 한껏 위축된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다신 뭐 사주나 봐라.'



친정아버지의 생일을 앞둔 어느 날. 

하필 다락에 물건을 가지러 올라갔던 나는 오래된 LP판 꾸러미를 발견했다.

'아, LP 플레이어가 없으니 틀지도 못하고 묵혀두게 되는구나... 언제 여유가 되면 하나 사야겠다. 맞다! 아버지도 LP판만 있다고 플레이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나는 당장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 생신 때 LP 플레이어를 하나 사드릴까 하는데, 어때?"

"LP 플레이어? 좋은 생각이긴 한데, 엄마한테 한소리 듣지 않을까?"

소심한 동생은 "아휴~~~ 이건 또 왜 샀니? 하여간 쓸데없는데 돈도 잘 쓴다."라고 할 것 같은 엄마의 폭풍 잔소리를 먼저 걱정했다.

"걱정 마. 내가 커버할게. 아버지 생신이니까 아버지 갖고 싶어 하는 거 사드리는 게 맞지~"


고풍스러우면서도 라디오, 카세트테이프, CD, USB까지 플레이되는 적당한 가격의 플레이어를 장만했다. 주문을 하던 순간부터 배송 온 물건을 보자기로 포장하는 나를 지켜보던 남편의 눈에, 탐탁지 않아 보이는 감정이 가득 차 보였다.

'또 괜한 짓 한다. 쯧쯧쯧. 봉투나 드리지...' 하는 마음의 소리가 내 뒤통수에 꽂히는 것 같았다. 


생일 파티 당일. 

육중한 상자를 낑낑 들고 집에 들어서자 어머니 아버지 모두 눈이 동그래지셨다. 

"그게 다 뭐냐?"라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아버지 앞에 선물을 놓아드리고 보자기를 풀러 드렸다. 

플레이어가 드러남과 동시에 아버지의 입에서는 탄성이 터졌다.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시는 눈꼬리, 입꼬리를 분명 보았다. 

"할아버지~ 마음에 드세요?"라고 묻는 초3 손주의 물음에 아버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응~~~ 좋아~~~ 너~~~ 무 좋아~"

주방에서 과일을 깎던 어머니는 선물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그건 어디서 났어~ 샀어? 그런 건 왜 사와~ 하여간 쓸데없이~"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게 타박부터 하는 사람이었지만, 제일 먼저 LP판을 찾아들고 플레이어 앞에 줄을 선 것도 엄마였다.

"이것 틀어보자. 내가 처녀 때 산 영화음악 판이야.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고 얼마나 울었던지... 인도 영환데 목숨을 살려준 코끼리를 오해해서 죽이게 된다는 내용이야. 난 노래도 다 기억나. 50년 된 판인데 잘 나오려나? 어머어머. 50년 됐는데 어쩜 그대로 나올까? 너무 신기하다. 맞아 맞아! 이 노래야! 이거 남자 주인공이 직접 불렀다지 아마?"

 LP판 특유의 거친 음색은 엄마, 아빠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집에 있는 LP판을 모두 갖고 와서는 모조리 틀어볼 기세였다.  아버지는 가장 좋아하던 영화 음악인 < Sound of Music > 판을 올려놓고 바늘을 옮겨가며 이곡 저곡 틀어보셨다. 


나의 모험정신 가득한 이번 시도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언니는 진짜 용감하다. 난 엄마한테 잔소리 들을게 걱정돼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데 언니는 늘 저지르고 보는 스타일이잖아. 이번에는 제대로 통했네." 


어렸을 때, 부모님 결혼기념일이나 생신에 야심 차게 준비했으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된통 혼났던 선물이 한두 개가 아니다. 준 사람 성의는 생각도 안 한다며 부모님을 향해 품었던 야속한 마음이 한가득이었으며 '다시는 뭐 해드리나 봐라.'라고 다짐한 것도 수십 번이다. 그럼에도 난 지속적으로 고민했다. 돈 말고 어떤 걸 드리면 좋아하실까. 이번에는 다행히 두 분 다 흡족해하시는 잿팟을 터뜨렸다. 다행이다. 



주부로 살면서도 얼마나 많은 '새로운 시도'들을 했겠는가. 남편은 내게 새로운 시도 좀 하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20년 동안 나의 선택이 늘 틀렸던 건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가족들 맘에 쏙 드는 신발과 옷을 샀던 경우도 있었을 테고 꼭 필요했던 걸 준비해주던 때도 있다.

새로운 시도 덕분에 쏘주를 부르는 맛깔난 음식도 탄생했을 것이고 요리 실력도 차츰 늘었겠지.

내가 무슨 신도 아니고, 아무리 고민하고 따져본다 한들 누구나 만족하는 결과를 매번 빚어낼 수는 없는 법이다. 


시도했다 실패하면 다시는 그 길로 안 가면 그만이다. 다시는 시도조차 하지 말라는 건, 숨도 쉬지 말라는 말처럼 들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전하고 평온한 삶, 한 푼의 손해도 발생하지 않는 삶을 살지 않는 나를 남편은 한심하게 여기겠지만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한심하게 살 것 같다.


궁금하면 두드려보고, 냄새 보고, 맛보고, 사보고, 만들어보고, 가보고 온갖 것을 다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후회하거나 만족하거나 자책하거나 자찬하기를 반복할 것이다. 

'다신 뭐 사주나 봐라!'라고 씩씩대며 다짐했던 것은 금세 잊고, 이내 시도 본능이 꿈틀댈 것이다. 


아버지 생신 선물인데, 플레이어 앞에서 떠날 줄 모르던 엄마... 오래 된 LP판을 몽땅 들고 나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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