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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Dec 20. 2021

거품기와의 불편한 동거

딸기! 오케이 딸기.

어묵! 오케이 어묵.

두반장! 오케이 두반장.

...

치즈? 슬라이스 치즈? 내가 이걸 시켰던가?

배송된 물건과 영수증을 대조하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낯선 정체에 당황함을 숨기지 못한 나였다.

이미 냉장고에 슬라이스 치즈가 있는데 내가 이걸 주문했다고?

주문 내역을 살펴보니 치즈는 없다.

사은품일까?

이렇게 큰 배꼽만 한 사은품을 줄 '배'가 될만한 물건 없었다. 과일치즈를 하나 사긴 했지만 2,166원짜리 물건에 5,980원짜리 치즈가 붙어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결론은, 오배송이다. 누군가의 장바구니로 들어갈 물건이 어쩌다 내게로 흘러들어온 것일 터.

당연히 대형마트에서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물건을 받지 못한 고객의 항의 전화를 받은 고객센터 직원은 "죄송합니다~ 고객님~"이라는 사과를 대기업 대신 전하고 "물건을 재배송 해드릴까요, 아니면 환불 조치해드릴까요?"라며 빈틈없는 고객응대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온 이 치즈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모른 척하고 먹ㅇ.....?'라는 생각이 나올 틈도 없이 고객센터 채팅 화면에 상품 오배송 문의를 입력했다. 채팅창의 얼굴 없는 직원은 월요일에 회수하겠다고 했고 그때까지 잘 보관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 당연한 일에 나는 나를 칭찬함과 동시에  20여 년 전 나의 치부를 자동 소환해냈다. 


...

죄책감 없이 실컷 먹을 수 있는 시기가 임신했을 때라면, 소비에 대한 죄책감 없이 실컷 쇼핑할 수 있는 시기는 신혼살림을 장만하는 때다.

결혼을 앞둔 신부는 살림장만에 한창이었다.  저녁마다 엄마와 함께 대형마트에 가서 엄마의 지시에 따라 크고 작은 생활용품들을 카트에 넣고는 했다. 20년 간 한두 번 썼을까 말까 한 도토리묵용 칼과 파 채칼도 그때 장만한 것들이다.

그날도 카트 하나 가득 '사두면 언젠가 쓸 일이 꼭 있다는' 엄마 피셜 부엌살림들을 양손 가득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짐을 하나하나 풀며 정리하고 영수증을 보는데 계산되지 않은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3,000원이 채 안 되는 소형 거품기였다.

계란 풀기에 이것만 한 게 없다는 엄마 때문에 카트에 담았던 기억은 나는데 계산한 기억은 없었다. 다른 물건에 휩쓸려 계산대를 스리슬쩍 통과해 장바구니로 흘러들어온 것일까. 구체적인 여정을 알길 없지만 아무튼 그렇게 거품기는 새색시와 원팀이 됐다.


그런데 문제는, 달걀을 풀 때마다 도둑질한 물건을 쓰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었다. 작정하고 도둑질 한 물건 같으면 그런 마음도 들지 않겠지만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날 도둑년으로 만든 거품기는 쓸 때마다 찝찝했다. 스테인리스라 20년이 지났어도 새것 같은 거품기를, 그때 그 마트 주방용품 코너에  되돌려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버리자니 그건 또 과한 조치 같았다.


세월이 많이 흘러 거품기와의 동거가 편해질 만도 하건만 이제는 한 술 더 떠서 엄숙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거품기를 마주한다.

내가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 주고 내가 어떨 때 마음 한구석 불편함을 느끼는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물건이 된 것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을 함부로 탐하고 싶을 때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주고 누가 지켜보지 않더라도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신독'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

내 마음의 순도를 시험하는 시금석.


잘못 배송 온 5,000원짜리 치즈 하나도 함부로 들이지 못하는 이유다.


그나저나...

가지러 온다는 연락이 없어 문 앞에 내놓지 못했는데 새벽에 회수가 완료됐다는 문자를 받았으니...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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