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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r 06. 2022

결혼을 기념하는 일이 과거형인 이유

2000년 3월 4일.

스물네 살의 나이에 결혼했다. 남편은 스물여덟 살이었다. 3년 반의 연애 끝,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취업 대신 결혼을 선택했다. 취업과 결혼이 왜 둘 중 하나 선택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는지 지금으로선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만큼 간절하고 열렬히 사랑만 했다고 감히 말한다.


이후로 몇 년간 3월 4일은 꼭 챙기는 날이었다. 의미 있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을 가졌다는 표현이 맞겠다. 우리가 처음으로 가족이 된 날, 둘이 하나가 된 날, 사랑이 결실을 이룬 날 등으로 그날을 기념하지 않았을까. 그랬던 내가 결혼기념일을 과거형으로 말하는 이유는...


스무 해가 넘도록 한 남자 한 여자가 한 이불을 덮고 잔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생명을 잉태하거나 은밀한 이불속 송사가 오간 세월을 뜻하기도 하지만 동상이몽을 넘어 이불에 수놓은 원앙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던 충동까지를 포함한다.

죽을 듯이 사랑해서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싸우다가 무심하게 사랑하고 미친 듯이 싸우던 시절을 지나왔다. 그 터널을 빠져나오던 때부터였을까. 결혼기념일을 하찮게 여기게 된 것이 말이다.


결혼기념일이랍시고 아침부터 호들갑을 떨며 서로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고 괜찮은 식당에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해졌다. 케이크에 초를 꼽고 불을 붙이는 일은 하찮게 여겨졌다. 우리가 행복하면서도 부끄러운 얼굴을 하고는 동그랗게 모은 입으로 초를 끄는 장면을 상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는 몸짓을 '딱 하루'에 몰아넣는 기분.


흔들거리는 촛불 하나에 위태로웠던 순간들이 피어올랐다.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지만 서로에게 만족하지 못한 순간도 있게 마련이었다. 아이들에게는 행복한 부모의 모습만 각인시키고 싶었지만, 문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아이가 온몸의 세포를 총동원해 감지했을 집안의 이상한 온도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을 생각하면 아이들 앞에서 결혼기념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는 것이 창피했다.


또 다른 촛불에서는 '으이그, 평소에나 잘 살 것이지...'라는 자조가 피어올랐다. 매일 악다구니 쓰며 당장 헤어질 것처럼 싸우면서 결혼기념일만 되면 고가의 선물에 해외여행까지 나누는 이들이 떠올랐다. 물론 그날 하루만이라도 결혼의 의미를 되새기고 행복을 다짐하는 것임은 안다. 그게 결혼기념일의 일반적인 의미이기도 하고 말이다. 다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결혼기념일 당일에 한정된 의미, 기쁨으로 두고 싶지 않았다. 그날을 기점으로 이듬해 결혼기념일 전날까지 매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일신우일신'의 사명으로 후회하지 않을 하루하루를 남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정작 당사자는 이렇게 흘려보내는 날을 매년 잊지 않고 챙겨주는 분이 있다. 아버지다.

결혼기념일 아침이 되면 딸과 사위에게 똑같은 문자를 보내신다.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룬 날을 축하하며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날들이 이어지길 바란다."

문자 마지막에 하트 두 개도 잊지 않으신다. 22년을 한 해도 빠짐없이 해오신 일이다. 아버지 덕분에 매일매일에 최선을 다하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시라도 우리 부부에 문제가 생겨 더는 결혼기념일을 챙기실 수 없게 됐을 때 아버지가 느낄 상실감이 눈에 밟혔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그런데 올해 아버지는 좀 이상했다. 매해 이른 아침 문자만 주시더니 이번에는 돈을 송금해주신 것이다. 20여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족들과 맛있는 식사라도 하라며 보내주신 돈보다 더 가슴을 때린 것은 문자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올해는 왠지 보내주고 싶다!"

황급히 전화를 드렸다. 왜 '올해는 왠지'인지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그냥'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식사 중, 큰딸 결혼기념일이라 십만 원을 보냈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울먹이셨다는 내용이었다. 어머니도 덩달아 울컥하셨는데 지나고 보니 왜 '올해는'이었으며 왜 울먹였는지를 모르겠다고 하셨다. 영문을 모르는 일에 엄마는 동생을 앞세워 출근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올해는'이었으며 왜 울컥하셨는지를 물었다. 아버지의 대답은 '별!'이었다. 별걱정을 다하고 있다는 말.

아무 일 없으니 걱정 말라는 말을 외마디로 던진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보며 혹시 비밀스러운 사연이 있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어머니를 보며 피식 웃음이 났다. 평생을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차가 막혀도 싸우고 길을 잘못 들어도 싸우고 말을 안 한다고 싸우고 말을 많이 한다고 싸웠다. 아이들이 들을까 문 닫고 조용히 숨소리로만 싸우지도 않으셨다. 요즘에도 아버지의 음주귀가에 고성이 오가고 어머니의 잔소리에 방문이 쾅 닫힌다. 그런 그들이지만, 여전히 매일매일 저녁밥을 먹으며 서로를 관찰하고 작은 떨림에도 기민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격정적으로 싸우던 것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던 결혼생활의 단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말이다.



내가 결혼기념일을 특별하게 보내지 않는 이유는, 매일매일 그날이 그날 같은 결혼생활에 더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결혼기념일 당일에 "결혼기념일이네~ 살아줘서 고마워~"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는 것으로 충분히 가득한 하루가 된다. 오늘부터 다시 1년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오늘, 내일, 모레, 그렇게 매일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반응하며 사는 것이, 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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