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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r 17. 2022

학부모로서 마지막 해

학부모총회 철이다.

코로나로 개학까지 늦어졌던 2020년에는 총회를 못했다. 작년에는 처음으로 유튜브와 줌을 활용해 진행했으며 올해는 다를 줄 알았던 상황이 이어져, 아니 더욱 심화돼 결국 또 비대면 총회를 해야 했다.


4년간 역임했던 학부모회장, 5년간 몸담았던 학부모회를 마무리하는 날이었다. 3학년 대표를 맡아달라는 제안도 있었으나 과감히 거절했다. 너무 질척대며 학부모회에 남아있는 듯 여겨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올해는 예년과 다르게 보내고 싶었다. 학부모로서 보내는 마지막 해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어떤 이가 "학부모회장 놀음이나 하는 여자"라고 나를 칭한 적이 있다. 다행히 우리 학교 학부모도 아니고 나를 잘 아는 이도 아니었으니 상처는 덜했다. 그 말이 가진 날카로움을 비난하고픈 의도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마음으로 역할을 수행한 건 아니었을까? 나는 어떤 마음으로 지내왔을까?' 하며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학부모회장은 늘 민원과 불평불만에 시달려야 하는 자리였다. 입시라는 예민한 목표가 최우선인 고등학교에서 학부모들의 요구사항은 빗발쳤다.

급식이 짜다, 싱겁다, 맛없다, 양이 적다 같은 것은 귀여운 투정이었다. 영양사님께 전하기는 민망한 내용이었지만 일단 자양강장제 한 박스를 사들고 찾아갔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영양사 선생님도 하소연을 시작했다. 무례하게 행동하는 아이들로 받은 상처, 천명분 조리의 애로사항을 듣다 보면 밥투정은 할 수가 없었다. 연신 감사하다는 말씀만 드리며 굽실대고 나와야 했다. 큰 아이가 어느날 곤드레밥에서 큰 벌레가 나왔다며 사진을 찍어 보냈을 때,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마."라며 혼자 조용히 급식실을 찾았다. 아이는 그런 엄마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어떤 민원은 학교도, 나도 어쩔 수 없어서 답답한 불평이었다.

"3월인데 학교가 왜 이리 춥나요? 한겨울에는 시베리아인 거 아닌가요? 아이 발이 꽁꽁 얼었대요. 가뜩이나 신입생이라 학교 적응도 힘든데 학교까지 추우면 어떻게 합니까?"

최근 한 학부모님께서 나와 학교에 끊임없이 보낸 말씀이다. '교실에서 학생들이 직접 조절할 수 있는 냉난방기입니다, 코로나로 환기를 자주 하다 보니 온도가 내려가나 봅니다, 학교에서도 더 이상 어쩔 도리는 없어 보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해도 돌아오는 말은 하나였다.

"우리 아이가 춥대요."


휴대폰을 일괄 수거해 귀가 시 돌려주는 학교가 많다. 우리 아이가 다닌 학교는 학생들과 학교의 토론회를 통해 수년 전 규정을 개정했다. 수업시간 사용 금지라는 기본 규정을 남겨두고 학생들 자율 사용에 맡겨두기로 한 것이다. 대신 수업 중 몰래 사용하다 걸리면 하루에서 길게는 일주일까지 압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강제로 걷어주기를 원했고 학생들은 규칙을 지킬 테니 휴대하겠다고 했다. 그 갈등은 코로나 2년 차였던 지난해 극에 달했다. 원격수업을 하느라 내내 휴대폰만 들여다보는데 학교에 가서도 아이들이 휴대폰을 사용하도록 놔두는 것을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학생인권을 이야기하는 학교 측과 집에서는 말 안 들으니 학교에서라도 강제해달라는 학부모, 이미 길들여져버려 손에 들어온 자유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아이들. 뫼비우스의 띠였다.

긴 통화 후에는 한숨만 나왔다.


때로는 건설적인 비판도 있었다. 달라진 입시제도에 따른 교육과정 편제 변경을 요구한 학부모들의 의견이 있었던 것이다. 얼굴 붉히며 말씀하시는 학부모의 이야기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교감선생님께 전했다. 난감해하던 선생님들은 고민과 연구를 거듭하신 끝에 추후 반영을 약속했다. 원하던 답변은 아니었지만 학부모들은 수긍했다. 학교가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실감한 사례였다.



지나고 나니, 민원, 불평, 불만의 또 다른 이름은 소통이다. 학부모와 학교 사이에서 소통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겠다던 공약을 열심히 지켜냈노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학부모회장이랍시고 거들먹거릴 자리도, 그럴 일도 없었다. 그저 어딜 가나 굽신거리고 말을 조심해야 했다. 특히 학교에 가더라도 내 아이 이름을 거론할 수 없었다. OOO의 엄마라는 타이틀이 아이와 선생님 모두를 불편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학부모회 담당 선생님을 비롯한 몇몇 선생님을 제외하면 내가 누구의 엄마인지를 아는 이는 드물었다. 큰아이가 졸업한 후 그제야 놀라며 "진짜요? 호재 어머니셨다고요?"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말이다.



2021학년도 학부모회의 활동보고와 예결산 보고를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신임 회장을 도와 총회를 마무리했다. 지난 몇 년간의 회의자료, 학교 답신, 학부모 활동 기록이 담긴 USB 전달과 함께 5년 전 만든 학부모밴드 리더를 신임 회장님께 위임하는 것으로 모든 인수인계를 끝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나를 위해 치킨을 시켰다.


감사패가 총 네 개.

'큰 아이 2년, 작은 아이 2년, 공평하게 봉사했구나. 수고했다.'

스스로를 쓰담 쓰담하며 치킨을 먹었다. 지금까지 먹었던 중 가장 꿀맛이었고 가장 많이 먹었다. '갈 때 가더라도 치킨 한 마리 정도는 괜찮잖아?' 라며 조금은 비장하게 뜯었다.

"오늘 뭐했다고 치킨을 먹어?"라는 남편에게 "왜 한 게 없어! 5년 동안 얼마나 열심히 봉사했는데!"라며 노여워했다. 순간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흥칫뿡이다. 노래까지 부르느라 힘들었구만...



2008년부터 시작된 학부모로서의 삶은, 부모로 보낸 삶과는 또 다른 결로 나를 성장시켰다.

부모가 된다는 것이 한 아이를 키우며 나 역시 인간으로 성숙해지는 시간이었다면, 학부모가 된다는 것은 인간 송유정을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리 잡게 하는 시간이었다. 부모의 삶은 나와 아이에게 집중하는 것이었다면 학부모의 삶은 나와 아이를 넘어 학교와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부모 송유정과 학부모 송유정이 충돌하는 지점도 생겼지만 그 고민과 갈등이 나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했다. 그렇게 14년이 흘렀다.


이제 학부모로서의 시간이 1년도 남지 않았다. 다시 아이를 낳지 않는 이상은 학부모라는 타이틀을 쓸 일은 없다. 학부모 이후 부모의 삶으로 돌아가지만 14년 전의 나와는 사뭇 달라진 나다. 학부모회 덕분에 교육자원봉사를 시작했으니, 어쩌면 학부모 이후의 삶은 단절이 아니라 '시민'으로의 확장이 될 것이다. 그러니 올해는 학부모로서 마지막 해이자 새로운 원년을 준비하는 경건한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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