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 연휴 첫날, 지인 시아버지의 부고를 전해 들었습니다. 어쩔까 고민하다가 부의금만 보내드렸습니다. 마음에 여러 가지 핑계가 따라붙었지요. 내일이 추석이니까, 우리 집에 수험생이 있으니까, 2년 전 지인의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경주까지 갔으니까... 그렇게 장례식장 방문을 피하려고 했던 제 이기적인 핑계는 더 이상 맥을 출 수 없었습니다. 이후로 열흘 동안 세 분의 부고를 더 받았고 어떤 이유로도 외면할 수 없는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 네 번의 부고를 받고, 때로는 이틀, 때로는 사흘, 때로는 장지까지 함께하면서 죽음이란 단어에 매몰됐던 며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의 마음을 저는 아직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겨진 가족의 슬픔을 헤아리기 힘듭니다. 그저, 힘들겠구나 생각할 뿐입니다. 그런데 눈물이 나더군요. 한 번도 뵌 적 없는 고인의 영정사진 앞에서 흐느낀 적도 있지요. '죽음'이라는 단어에 따라붙는 학습된 슬픔이라는 게 있는 걸까, 나는 왜 슬픈가, 무엇이 슬픈가를 고민했습니다. 왜 기분이 가라앉고 왜 무기력해지는가.
제가 장례식장에서 본 것은 고인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슬픔과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산책을 하고 커피숍에 들러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다 조용히 눈 감으신 친구의 아버지, 그리고 남겨진 그의 딸.
전날까지만 해도 시어머니와 즐겁게 이야기 나누셨다는데 간밤에 운명하신 시이모님, 그리고 남겨진 그녀의 동생들.
올 초에 6주 시한부 판정을 받았지만 반년을 더 가족들과 함께 보내다 하늘로 떠난 50대 가장, 그리고 남겨진 아내와 두 아들.
생전 고인을 떠올리고 가시는 길 편안하기를 애도하는 자리에 가서 산 사람만을 보았습니다. 고인에게는 죄송스러운 마음 크지만, 솔직한 심정입니다. 남겨진, 나와 관계된, 나의 소중한 사람들의 슬픔만이 크게 느껴져 슬펐습니다. 결국 저는, 여전히 죽음은 알지 못한 채 삶만을 바라봅니다. 산다는 것의 무게, 고난, 괴로움과 산다는 것의 기쁨, 행복, 즐거움에만 반응합니다. 영정 속 얼굴보다는 산 사람들의 표정만 보입니다.
이별하기 전에 챙겨야지, 떠나기 전에 사랑해야지, 함께 있는 것에 감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