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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Sep 25. 2022

죽음을 모릅니다.

추석 명절 연휴 첫날, 지인 시아버지의 부고를 전해 들었습니다. 어쩔까 고민하다가 부의금만 보내드렸습니다. 마음에 여러 가지 핑계가 따라붙었지요. 내일이 추석이니까, 우리 집에 수험생이 있으니까, 2년 전 지인의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경주까지 갔으니까... 그렇게 장례식장 방문을 피하려고 했던 제 이기적인 핑계는 더 이상 맥을 출 수 없었습니다. 이후로 열흘 동안 세 분의 부고를 더 받았고 어떤 이유로도 외면할 수 없는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 네 번의 부고를 받고, 때로는 이틀, 때로는 사흘, 때로는 장지까지 함께하면서 죽음이란 단어에 매몰됐던 며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의 마음을 저는 아직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겨진 가족의 슬픔을 헤아리기 힘듭니다. 그저, 힘들겠구나 생각할 뿐입니다. 그런데 눈물이 나더군요. 한 번도 뵌 적 없는 고인의 영정사진 앞에서 흐느낀 적도 있지요. '죽음'이라는 단어에 따라붙는 학습된 슬픔이라는 게 있는 걸까, 나는 왜 슬픈가, 무엇이 슬픈가를 고민했습니다. 왜 기분이 가라앉고 왜 무기력해지는가. 


제가 장례식장에서 본 것은 고인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슬픔과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산책을 하고 커피숍에 들러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다 조용히 눈 감으신 친구의 아버지, 그리고 남겨진 그의 딸.

전날까지만 해도 시어머니와 즐겁게 이야기 나누셨다는데 간밤에 운명하신 시이모님, 그리고 남겨진 그녀의 동생들.

올 초에 6주 시한부 판정을 받았지만 반년을 더 가족들과 함께 보내다 하늘로 떠난 50대 가장, 그리고 남겨진 아내와 두 아들. 

생전 고인을 떠올리고 가시는 길 편안하기를 애도하는 자리에 가서 산 사람만을 보았습니다. 고인에게는 죄송스러운 마음 크지만, 솔직한 심정입니다. 남겨진, 나와 관계된, 나의 소중한 사람들의 슬픔만이 크게 느껴져 슬펐습니다. 결국 저는, 여전히 죽음은 알지 못한 채 삶만을 바라봅니다. 산다는 것의 무게, 고난, 괴로움과 산다는 것의 기쁨, 행복, 즐거움에만 반응합니다. 영정 속 얼굴보다는 산 사람들의 표정만 보입니다. 

이별하기 전에 챙겨야지, 떠나기 전에 사랑해야지, 함께 있는 것에 감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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