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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y 13. 2023

최악이 이 정도라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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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습니다.

늘상 있는 일인데도 남편의 스킨십에 짜증이 심하게 일었거든요. 교육자원봉사센터에서 디베이트 공개강좌가 있어 서둘러 채비를 하는데 왔다 갔다 하며 엉덩이를 계속 툭툭 치는 게 아니겠어요? 짜증도 한 바가지 내고 남편에게 눈으로도 심한 욕을 했습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어떤 때는 이런 저의 반응에 남편이 되려 화를 내기도 하는데, 그날이 딱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괜한 감정싸움으로 번질까 봐 서둘러 자리를 피했습니다.


..

교육자원봉사센터에서 각 팀별로 공개수업을 준비했습니다. 교육봉사에 관심 있는 사람 혹은 각 프로그램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는 일을 알리고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체험해보게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은 신청자가 5명 미만이라 폐강되기도 했고 어떤 프로그램은 17명이나 신청하기도 했습니다. 디베이트는 7명이 신청을 했는데, 그중 2명은 기존에 있던 '패널 시어터'라는 인형극 프로그램 봉사자들이었습니다. 그저 디베이트가 궁금해서 듣고 싶다는 분들이었죠.


일찍 도착해 TV 화면에 노트북을 연결하고 PPT 화면을 띄웠습니다. 교육자원봉사, 디베이트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하고 직접 디베이트 실습을 해보는 2시간짜리 강좌. 강의료도 책정되어 있어서 "나 오늘 교자봉 강의는 돈 받는 강의거든? 그러니까 나 귀찮게 하지 말라고~~"라며 남편에게 큰소리치고 나온 터였지요.

강의 시작 시간이 10시였는데, 우리 팀 봉사자 두 분과 패널 시어터 봉사자 두 분이 자리를 채웠습니다. 10시 15분까지 기다렸지만 5명 모두 불참. 직전에 못 온다는 문자를 주신 분도 계시고 연락이 안 되는 분도 계셨지만 결론은 모두  'No Show'였습니다.

모두가 황당한 가운데, 저는 두 분의 패널시어터 봉사자분들에게 30분 동안 디베이트에 대해 설명해 드렸습니다. 이어서 저희 팀 봉사자 중 입시 컨설팅을 하는 선생님이 상담을 해주셨지요. 강의를 왔지만 강의는 하지 못한 상황이라 업무담당자에게는 강의료를 받지 않겠노라 의사를 밝혔습니다.

"나름 우리끼리 의미 있게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렵니다."라는 제 말에 업무담당자가 말했습니다.

"쌤. 그것도 병이어요~ 모든 일에 의미 부여하는 거~"

"제가 살려고 그러는 거예요. 안 그러면 화병 나서 어떻게 살아요."

저라고 왜 씁쓸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제가 저를 다독이는 방법입니다. 모든 일에 의미 부여하기...


...

씁쓸한 마음으로 귀가하며 휴대폰을 보니 다음 주부터 특강이 예정되어 있는 학교 선생님께서 학생 출석부 작성을 독촉하는 문자가 와 있었습니다. 출석부 작성은 담당 선생님의 업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어려운 일이냐...'싶어 집에 가자마자 처리해야지 생각하며 귀가를 서둘렀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특강 신청서에서 학년과 반, 이름을 확인해 명단을 작성하려는 순간, 담당 선생님이 출석부를 보내왔습니다. 아마도 굉장히 굼뜬 강사라고 생각하셨겠지요. 금요일 오후, 일을 마치고 퇴근을 해야 하는데 톡을 읽지도 않고 있으니 애가 닳으셨던 터. 결국은 당신이 출석부를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출석부를 확인했는데, 글쎄 제가 받은 신청서 명단과 선생님이 보낸 출석부 명단이 다른 거 아니겠습니까? 바로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리고 전화를 끊는데...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습니다. 신청서 명단의 학생 이름과 선생님이 보낸 출석부 명단이 갑자기 일치하기 시작한 겁니다. 여태 저는 부모님 이름을 학생 이름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얼른 다시 연락해 저의 착각을 자수했습니다만,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침에 몇 번이고 확인한 명단이었는데, 눈에 뭐가 씌지 않고서야 이런 실수를 할 수가 있나 하는 자책이 일었지요.

"수업받는 학생들과 학부모 모두에게 다음 주 특강 시작을 알리는 문자를 보내세요, 보냈나요, 학생과 학부모 모두에게 보냈나요?" 라며 이른 아침부터 재촉했던 선생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일었던 것이 제 판단력을 흐리게 해서 성급히 행동하게 만든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 제 불찰이지요. 하지만 다른 핑곗거리가 필요했습니다.


....

자주 쓰는 카드사 어플에서 운세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그게 곧잘 맞았다는 기억이 떠올라 오늘의 운세를 확인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그날은 1년 중에 최악의 날 중 하나였습니다.

5월 12일 운세 총론

직장이나 자녀의 문제 혹은 진로나 일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날입니다. 오늘은 신살의 기운이 좋지 않은 날로써 일 년 중 반드시 피해야 하는 날 중 하루입니다. 전체적인 운의 흐름과 관계없이 중요한 결정은 후일로 미루시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 중 새롭게 추진하는 일이나 약속을 하신 부분이 있다면 진행되거나 지켜지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확실한 일이라도 반드시 본인이 직접 확인하고 챙기셔야 합니다. 마무리가 힘든 날이니 섣불리 예측하고 먼저 행동하게 되면 공연히 실없는 사람이 될 것이니 절대 먼저 예측하고 앞서가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차질'

'실없는 사람'

이 두 단어가 오늘의 핵심 키워드였던 겁니다. 오전에는 일에 차질이 생겼고 오후에는 실없는 사람이 되었던 하루. 올 한 해중 최악의 날 중 하루.


하루가 끝날 때까지 노심초사했습니다. 가족과의 대화 시에도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신중을 기했고 일과 엮인 톡방에서는 최대한 말을 삼갔습니다. 그렇게 조심조심 하루를 달래며 보낸 뒤 잠자리에 드는데, 이 정도가 최악이라면 참 다행이구나 싶었습니다. 누가 크게 다치거나 큰 손해를 입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실수로 인해 체면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명예가 엄청나게 실추된 것도 아니었으며 충실한 수업으로 희석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오늘 일로 사람과 삶 앞에서 더 겸손해지자는 교훈을 얻었으니 일 년 중 가장 큰 가르침을 얻은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일에 의미 부여하는 게 병이라지만, 얼마든지 앓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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