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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Dec 18. 2021

가장 맛있는 한 모금이 되기를...

저녁 식사 반주로 위스키 한잔.

소주를 한 병씩 먹던 남편 얼마 전부터 바꾸기로 한 음주습관입니다. 적당히 기분 좋게 취하고 안주 흡입도 막기 위한 조치이죠.

남편만의 기호 변화인 줄 알았던 위스키 즐기기는 이미 트렌드가 되어있더군요. 코로나19가 가져온 변화였습니다. 밤늦게까지, 혹은 새벽녘까지 골목길을 전전하며 곤드레만드레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셔대던 사람들이 일찍 귀가하면서 적당히, 음미하는 혼술 문화가 싹텄습니다.  


편안하고 여유롭게 위스키 한잔을 음미하는 남편의 모습이 제 맘에도 들었나 봅니다.

그날이 그날 같아 보이던 남편에게 즐길 거리가 생겼다는 것이 저에게도 신나는 일이 되었나보구요.

위스키에 관심도 없고 맛도 모르는 저이지만 관련 카페에 가입을 하고 올라오는 글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맘카페는 저리 가라 할 정도였습니다.

어디에 어떤 술이 몇 병 남았다, 어디에 입고됐다, 오픈 전에 줄 서있었는데 이미 내 앞에 몇 명이다...

위스키에 진심인 남편들이 수만 명 모여있더군요.


최근에 올라온 글과 댓글에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코스트코 OO점에 OOO 품절돼서 실망스러운 발길로 돌아서는데, 직원분이 두병 건네주셨습니다. 누군가 매대 옆 반품 카트에 두고 갔다구요."

라며 구매 성공 사진까지 올린 글이 올라왔습니다. 거기에 어떤 이가 단 댓글...

"왜 반품했을까요? 아내에게 등짝 스매싱이라도 당한 걸까요? ㅋㅋㅋ 당장 돌려놓고 와! 라면서?ㅎㅎ"


남편들의 수다를 살짝 엿보는 기분이었습니다. 동시에 제 남편의 마음도 헤아려볼 수 있었죠.


...

"OOO이 꽤나 인기인가 봐? 남자들이 그거 못 사서 난리더라~ 어디에 몇 병 남았다, 오픈런했다, 하면서 시끌시끌해. 여자들 샤넬백 오픈런은 저리 가라야~"

"그러게 말이야? 가방은 남기라도 하지. 위스키는 먹어 없어지는건데말이지. OOO은 싱글몰트 위스키 중에서 알아주는 거지."

"당신도 한 병 사지 그랬어? 하긴 구하기가 어렵다고는 하더라."

"회사 앞 이마트 에브리데이에 가끔 들어오긴 하더라고."

"들어왔을 때 사지~"

"....... 또 들어오겠지 뭐."


압니다.

남편은 먹어 없어질 술 한 병에 10만 원을 쓰는 사람이 못된다는 것을요.

퇴근 후 마시는 그 한잔이 너무 소중하고 그 시간이 꽤 행복하지만 소주 한병의 수십 배에 달하는 위스키 한 병에 '소확행'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그 구하기 어렵다는 술을 저는 몇 주전 몰래 구해놓았습니다.

위스키 카페를 들여다보다가 눈동냥으로 얻은 구매 팁 덕이었습니다. 제일 인기 많은 종류는 아니었지만 차선은 돼 보이는 놈으로 얼른 사 와서는 꽁꽁 숨겨두었습니다.  

저에게도 술 한병 10만 원은 쉽지 않은 소비입니다만, 남편에게 안겨줬을 때 10만 원을 편하게 쓰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때를 기다리기로 했죠. 남편이 제 선물을 제일 기분 좋게 받아줄 수 있는 때, 가장 맛있게 음미할 수 있는 때를요.


오늘이 그날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친구들과 호텔에서 1박 2일의 망년회를 갖기로 한 날 즉, 남편이 아내 없이 완벽한 혼술을 즐길 수 있는 날인 거죠.

게다가, 제 입장에서는 비싼 술을 괜히 왜 샀냐는 타박을 면전에서 받지 않아도 되는 날이고, 남편 입장에서는 먹고 싶던 술을 아내 눈치 안 보고 실컷 즐길 수 있는 날이기도 한 겁니다.  


저녁 반찬거리를 해놓고 집을 나서기 전, 식탁 위에 남편을 위한 선물을 올려놓았습니다.

신파가 잔뜩 들어간 장문의 편지는 쓰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은 전하고 싶었습니다.

작은 메모지에 무미건조한 몇 자를 적어두었지요.

어렵게 구했음.
카드값 많이 줄이고 산거임.
쉐리오크 아니라고 서운해하지 말 것.
와이프 없는 즐거움이 배가 되기를 바람.


몇 자라고는 했지만 그 안에 담긴 구구절절한 사연이 떠올라 씩 웃음이 났습니다.

몇 자 안되지만 남편은 이 메모를 읽고 위스키 한 모금을 한참이나 음미하겠죠.

이렇게 또 하루를 살아갑니다~


참!

미처 적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눈물 나게 고맙더라도 몸으로 때울 생각하지 말 것!
맘으로만 때워도 충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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