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Sep 24. 2021

만가지 장점 vs. 한가지 치명적 단점

퍽! 찍!

"으아아아~~"

추석날 할머니 집을 나서던 작은 아이의 비명이 들렸다.

"왜! 무슨 일이야!"

"은행 열매 밟았어. 으으으으으 냄새 장난 아닐 텐데."

"난 또 무슨 큰일 난 줄 알았네. 괜찮아~"

"도대체 왜 가로수로 은행나무를 심은 거야? 사람들이 생각이 없어. 똥냄새나는 나무를 왜 가로수로 심었지?"

늦은 사춘기를 겪는 것인지 세상에 불만이 가득한 고2 아들의 포효가 시작됐습니다. 이럴 땐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그냥 들어줘야 하죠.

함께 걷던 남편이 가세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술 더 뜹니다.

"어떤 공무원의 실수로 벌어진 일이 이렇게 국가 재정의 낭비로 이어진 거야.  이게 뭐야? 떨어진 은행을 줍거나 떨어지는 걸 받아내기 위해 망을 설치하느라고 쓰는 세금 낭비는 어쩔 거냐고. 냄새는 또 어떻고."


그냥 놔둬도 될 것을 꼭 한마디 거드는 저입니다.

"너무하네~ 은행나무가 뭔 죄가 있다고. 은행나무를 가로수로 선택한 무슨 이유가 있겠지~ 검색 한번 해볼까? 그러네~~ 은행나무가 병충해에 강하고 공기정화능력이 탁월하대. 줄기가 곧고 나뭇잎이 커서 여름에 넓은 그늘을 만들어주고 오래 살 수 있고, 가을에 아름다운 단풍까지 보여주고... 장점이 훨씬 많네~"

갑자기 은행나무의 변호인이 되어버렸습니다. 100가지 장점을 가졌는데 하나의 흠결로 욕을 흠씬 먹고 있는 게 딱했던 겁니다.


"그래도~ 하나의 단점이 너무 크잖아. 그늘에 단풍까지 만들면 뭐해. 그 옆에 지나가기가 힘든데."

"좀 이해해주라~ 이 세상에 완벽한 게 어디 있니~ 냄새나는 시기는 잠깐이ㅈ..... 우웩! 냄새 진짜 대박!"

밀폐된 차 안에 갇히니 아들 신발에 묻은 터진 은행열매의 냄새는 마스크도 뚫고 들어왔습니다.

"거봐~ 엄마도 못 참잖아. 이 냄새 없어지기는 할까?"

"집에 가서 엄마가 물로 닦아줄게~ 엄마 말은, 냄새가 안 난다는 게 아니야~ 냄새가 고약한 건 알지만, 그게 은행나무의 수많은 장점을 가릴 만큼 치명적이지는 않다는 거지."


우리나라 가로수의 주요 수종은 은행나무, 왕벚나무, 이팝나무 순입니다. 2019년 기준 총 8,249,232 그루의 가로수 중 은행나무 1,029,882그루, 왕벚나무 991,203, 이팝나무가 607,541 그루이더군요. 요즘 새로 식재하는 나무들은 배롱나무, 무궁화나무처럼 꽃이 오래가는 것들이 인기라고 합니다. 새로 조성되는 신도시에는 기존에 보지 못했던 다양한 수종이 식재되고 있어 시민들의 만족도가 높다고 하네요.

어딜 가나 똑같은 나무가 늘어선 것보다는 다양한 나무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분명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며 몸집을 키워온 나무들을 베거나 폐기하면서까지 의도적인 변화를 줘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어느 지자체에서는 도시재생사업이라는 이유로 30년 이상 된 은행나무를 옮기거나 폐기해서 논란이 됐습니다. 가로수가 건물을 훼손하고 악취가 심하다는 민원과 도시재생사업이  가로수를 뽑고 길을 다시 조성하는데 38억 원을 쓴 이유였습니다.


"꼭 그렇게 다 뽑아버려야 속이 후련했냐?"라고 소리치고 싶을 만큼 은행나무가 그렇게 골칫덩이였는지 의문입니다.


눈에 거슬리는 게 있을 때마다 없애버리려는 마음이란, 부족한 것 투성이인 인간의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한두 달 동안 잠깐 풍기는 냄새쯤이야 너그럽게 이해하고도 남을 만큼 은행나무는 많은 것을 주고 있지 않을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치킨 한 마리 값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