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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Dec 23. 2021

아버지의 이름으로...

9시도 안 된 시각, 남편은 벌써 취해 귀가했습니다.

달라진 방역지침 때문에 4시부터 거래처 사람과 한잔 했다는 그는, 거나함이 2% 부족했던지 위스키 한잔을 따라 제 앞에 앉았습니다. 

'즈응흐 들으그 즈르...' (조용히 들어가 자라...)라는 제 마음의 소리는 전해지지 않았던 거죠... 


"술 마시다가 당신한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생겼어."

"아... 그래?  뭔데?" 

"이번에 청와대 민정수석이 아들의 입사지원서 일로 사임한 것 알지?"

"알지."

"공정의 이슈를 건드렸으니 사임하는 게 맞지만, 민정수석이 사의를 표하며 한 말이 난 마음에 걸리더라구."

"뭐라고 했는데?"


"'아버지로서 부족함이 있었다, 전적으로 자신의 불찰이다'라고까지만 했어야 했는데, 아들이 불안과 강박 증세로 치료를 받아왔다고 말했거든. 난 그 부분이 아버지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구. 당연히 아들이 잘못한 건 맞지만, 성인인 자식이니까 사과나 변명 모두 자식의 몫인데 그걸 아버지가 아들의 정신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게 불편하더라. 내가 아들이면, 아버지 얼굴 보기 싫을 것 같아. 얼마나 대단한 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서 불명예스럽게 내려오는 것이 적어도 자기 잘못은 아니라는 말, 아들의 정신적 문제 때문이라는 말을 굳이 하고 싶었던 거잖아."

"아... 그렇겠네... 아들의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치부일 수 있는 부분을 드러내면서까지 얘기했으니 아들 입장에서는 기분 나빴을 수 있겠네."


"그래서 말인데, 혹시라도 내가 나중에 그 정도로 큰 자리를 맡게 된다거나 재벌이라도 돼서 비슷한 상황에 처했는데 민정수석과 같은 처신을 하려 들거든, 당신이 내 등짝 좀 때려줘~ 알았지? 오늘의 대화를 나한테 꼭 얘기해줘야 돼?"


눈은 풀리고 혀는 꼬였지만 복잡해진 심경을 기어이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남편은 이후로도 한참을 당부하다가 이내 '아버지란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잘 모르겠어. 아버지라는 사람은 어때야 하는 건지. 예전에 이경규가 자신의 일본 유학을 이야기하면서 '자식이 잘 되는 게 무슨 소용이에요. 내가 잘 돼야지. 내 삶인데, 일단 내가 잘 되고 봐야지.'라고 했잖아? 그게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다가도 아이들 잘 키우는 게 먼저인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어떤 게 훌륭한 아버지상인지 잘 모르겠네..."


"당신, 지금도 훌륭한 아버지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먼 훗날 당신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 되어있더라도, 우리 아들들은 더 훌륭하고 멋지게 성장해 있을 테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아~ 우리만 잘하면 돼~"


절대, 술 취한 남편을 빨리 수습해 잠자리로 밀어 넣으려는 수작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이미 멋진 아버지라는 말은 꼭 해주고 싶던 말이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아무리 절박하다고 해도 부모 찬스에 기대거나 학력을 위조하면서까지 살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도 있습니다. 공정하지 못한 처사라는 생각 이전에, 모양 빠지면서 후지게 살고 싶지 않다는 아이들이니까요. 


자리에서 물러난 그분이 나쁜 아버지라거나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잘 모르죠. 집에서 그분이 어떤 아버지일지는요. 

자신의 업에 최선을 다하며 큰 뜻을 펼치는 것이 자식을 위한 길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자식의 정신적 문제를 방패 삼아 불명예스러운 사임을 희석해보려는 마음이 있었을지언정 집에서는 한없이 다정하고 자상한 아버지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갈 겁니다. 


이른 시간부터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훌륭한 아버지란 무엇인가'를 고민했을 남편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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