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는 크고 작은 행성들이 모여있고 행성마다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요. 우리랑 똑같이 생겼고 각자의 언어도 있었지요.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각 행성에서는 한 가지의 음식만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행성마다 날씨와 기후가 달랐는데 한 행성에서는 딱 한 가지 작물만 자라났거든요. 고구마 별에서는 고구마만, 바나나 별에서는 바나나만 기를 수 있었던 거예요. 사람들은 다른 걸 키워보려고 노력해 봤지만 어느 별에서도 성공하지 못했어요.
매일 한 가지 작물로만 만든 음식을 먹다 보니 사람들은 지겨워졌고 다른 작물의 맛이 궁금하기도 했어요. 더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 어느 날, 행성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의논을 했어요.
감자별 : 이제 감자라면 지긋지긋해요. 전 고구마도 먹고 싶고 바나나도 먹고 싶단 말이에요. 요즘 새로 생긴 별의 키위와 망고맛도 궁금해요.
바나나 별 : 맞아요. 더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요.
키위 별 : 저희 별은 생겨난 지 얼마 안 되어서 키위만 삼시세끼 먹어도 아직까지는 너무 새콤달콤 맛있기만 한데, 다른 것들의 맛이 궁금하기는 하네요.
고구마 별 :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서로의 작물들을 맛볼 수 있을까요?
고구마별 대표의 질문에 아무도 답하지 못했어요. 모두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죠.
고구마 별 : 그래서 제가 방법을 생각해봤는데요, 고구마 한 개에 키위 한 개, 이렇게 교환하는 건 어떨까요?
키위 별 : 무슨 말씀이세요? 키위를 어떻게 고구마 한 개랑 바꾸나요? 키위가 얼마나 맛있다구요?
고구마 별 :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세요? 고구마 맛도 모르면서!
바나나 별 : 저도 키위, 고구마, 감자 맛 다 모르고 궁금해요. 하지만 서로 한 개씩 교환하는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키위보다 바나나가 더 크고 고구마보다 더 매끈하게 잘 생겼잖아요. 왠지 저희 별이 더 손해 보는 것 같은데요?
수박 별 : 거참, 듣자 듣자 하니 너무들 하시네요. 수분이 많아서 갈증 해소도 되고 살도 안 찌는 데다가 크기까지 다른 작물의 몇 배나 되는데 어떻게 다른 과일 한 개와 교환합니까? 수박이 들으면 기가 막히다 하겠네요.
딸기 별 : 아웅.... 따우띠들 마떼요... 그렇게 따우띠면 딸기 똑땅해요~~
감자별 : 딸기 별은 조용히 하세요! 귀여운 척이나 할 줄 알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수박 별 : 거 말씀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감자는 배나 부르지 뭐 영양가나 있나 모르겠네.
바나나 별 : 영양가 많고 배부른 건 바나나가 으뜸이죠. 물만 가득 찬 수박, 오줌이나 마렵지 뭘?
행성 대표들의 싸움은 끝이 날줄 몰랐어요. 서로를 헐뜯고 자기만 잘났다고 하는 통에 며칠 동안 씩씩거리며 싸움만 하다가 각자 별로 돌아가버렸죠.
Chapter 2.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행성 회의에 참석했던 고구마 별 대표는 착잡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어요. 그렇게 싸우려고 모인 게 아니었는데 결국 서로를 비난하고 마음에 상처만 주고받은 채 헤어진 것이 안타까웠지요. 하지만 고구마 별 사람들도 고구마를 딸기 하나와 교환하는 건 좀 아깝다고 생각했어요. 수박 하나와 교환하는 것은 마음이 불편했지요.
다른 행성 대표들의 생각도 모두 마찬가지였어요. 조금만 화를 참고 좋은 방법을 찾아볼 걸 그랬나 후회했지만 이미 각자 집으로 돌아와 버렸으니 늦었다고 생각했지요.
"에이,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끼리도 얼마든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겠어. 감자만 먹고도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으면 되는 거지 뭐! 감자로 할 수 있는 음식이 얼마나 많다고. 삶은 감자, 감자튀김, 감자전, 으깬 감자, 옹심이, 감자떡. 이것만 먹어도 벌써 배부르구먼."
감자별 사람들 뿐 아니라 모든 행성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어요. 다시는 서로를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말이지요.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요.
한 가지 작물만 심었던 행성의 땅은 점점 생기를 잃어갔어요.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가 심각해졌고 사람들은 굶주림에 지쳐갔어요. 사람들의 성격도 이상해졌어요. 한 가지 작물만 먹다 보니 생각도 갇히고 이해심도 없어졌어요. 고구마 별의 상황도 같았어요. 고구마만 자라던 행성에서는 이제 고구마도 자라기 힘들어졌지요. 살기 좋은 이웃 행성으로 이사해볼까 고민했지만 그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어요.
고민 끝에 고구마 별 대표는 대국민 연설을 했어요. TV를 통해 고구마 별의 모두가 이 연설을 시청했죠.
"사랑하는 고구마 별 국민 여러분, 얼마나 힘드십니까.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게 이기적인 행성 대표들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에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행성들이 각자 자기주장만 했을 때, 저만이라도 화합을 위해 노력했어야 했는데 후회가 됩니다. 이제 같이 방법을 찾아보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서로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거든요. 따라서 저만이라도 우리 별의 국민들을 위해 방법을 찾으러 떠나기로 했습니다. 이 넓은 우주 어딘가에 고구마를 경작하며 다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행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행성을 찾아서 여러분을 모두 이주시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건강하게 살아계십시오."
고구마 별 대표는 연설을 마친 후 바로 우주탐사길에 나섰어요. 한 시가 급했기 때문이죠. 수년 전부터 연구한 끝에 태양계 어딘가에 괜찮은 행성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아냈어요. 하루빨리 그 별에 도착해 별의 상태를 살피기만 하면 됐지요. 국민들을 살리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던 고구마 별 대표는 깜깜한 우주, 무한의 공간으로 힘껏 날아올랐어요.
#. Chapter 3. 멋진 신세계
수면 캡슐이 열렸어요. 목적지에 닿으면 수면모드가 자동 해제되도록 입력해 놓았거든요. 얼마 동안 잠들어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우주선 창문 밖으로 푸른 별 하나가 보였어요. 그렇게 맑고 찬란하게 푸른 별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어요. 황홀함 그 자체였죠. 조심스레 착륙한 고구마 별 대표는 이 행성의 온도와 습도, 공기가 고구마 경작에 딱 알맞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는 땅을 파고 모종 캡슐에서 조심스럽게 고구마 모종을 꺼내 정성스럽게 심었어요.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선선했으며 중간중간 내려주는 비 덕분에 고구마는 씩씩하게 자랐어요. 몇 년에 걸쳐 심고 또 심어보았는데 고구마는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잘 자랐죠. 어떤 때는 왕고구마가 열릴 정도로 농사가 잘 되기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고구마 별 대표는 신기한 장면을 목격했어요.
바로 고구마밭 옆에 당근도 자라고 있고 무도 자라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뿐 아니었어요. 수박, 감자, 바나나, 토마토, 딸기, 참외... 종류를 세기도 힘들 정도의 온갖 작물들이 고구마 옆에서 자라고 있는 거예요. 미묘한 기후의 차이에 따라 차례차례 순서를 정한 것처럼 말이에요.
따뜻한 날씨에는 딸기, 감자, 각종 쌈채소가, 더운 날씨에는 옥수수, 고추, 토마토가, 서늘한 날씨에는 단감, 밀, 호박이, 심지어 날이 추워져도 귤, 돼지감자 같은 작물이 자라났어요. 여러 가지 작물이 자라나니 땅도 건강할 수밖에 없었죠. 고구마 말고도 먹을 것이 넘쳐나는 곳. 이곳이 바로 지상낙원, 멋진 신세계였죠. 이 기쁜 소식을 빨리 고구마 별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말이죠.
#4. 찬란하고 푸른 별, 지구
고구마 별과 교신을 마친 고구마 별 대표는 이제야 마음이 놓였어요.
고구마가 잘 자라는 별, 다른 음식까지 함께 맛볼 수 있는 별을 찾았다는 사실이 기뻤고, 고구마 별 국민들이 서둘러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에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죠. 그제야 이 고마운 별을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고구마밭을 떠나 한참을 걷다 보니 바나나 농장이 보였어요. 그곳에서는 어떤 사람이 열심히 바나나를 따고 있었지요. 이 별에 도착한 후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요. 너무 반가워 한달음에 뛰어간 고구마 별 대표는 깜짝 놀랐어요. 그 사람은 바로 행성 회의에서 만났던 바나나 별 대표였거든요.
"아니... 당신은.... 당신이 여기 어떻게....?"
"어머나! 고구마 별 대표님 아니세요? 반가워요~ 여기서 이렇게 뵙다니... 결국 고구마 별에서도 다른 별을 찾고 계셨던 거군요?"
"아, 그럼 바나나 별도 저희처럼 새로운 행성을 찾을 생각을 하셨던 거군요?"
"하하하. 저희 둘만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아니에요. 그날 행성 회의에 모였던 모든 행성 대표들이 이 별에 모였답니다. 이렇게 모든 작물이 조화롭게 자라나는 행성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하하하."
"그랬군요. 정말 잘 됐네요. 처음부터 싸우지 않고 방법을 찾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죠."
"그저, 행복해해요 우리~ 얼마나 좋아요~ 이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행성을 찾았으니 말이에요. 그리고 사실, 그렇게 싸웠기 때문에 배우게 된 것이 많잖아요."
"그러네요. 우리는 아프지만 값진 교훈을 얻었네요. 서로가 다르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자기만 옳고 잘났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을요.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것도 말이에요. 무엇보다도, 세상에는 고구마 말고도 맛있는 게 너~~ 무 많다는 사실, 그걸 함께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고마워해야 한다는 걸요."
"맞아요~ 대표님. 그래서 말인데, 저랑 지구에서만 자라는 특별한 과일을 먹으러 가보실래요? 정말이지, 환상 그 자체예요~"
"좋아요~~ 좋고 말고요~~ 그런데, 지구라뇨? 이 행성의 이름이 지구인가요?"
"네~ 이 별을 '지구'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모든 행성의 작물과 사람들을 품어준 땅이잖아요. 예쁜 이름이죠?"
고구마 별 대표와 바나나 별 대표는 신나게 과일을 먹으러 갔습니다.
황폐해진 많은 별들이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선택한 곳이 바로 지구였어요. 서로 싸우기만 하던 사람들이 이 곳에 모여 오래오래 평화롭게 살게 되었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작물을 좋아하나요?
고구마? 딸기? 쌀? 콩?
여러분이 좋아하는 그 작물이 여러분의 고향 이름이에요.
지금 옆에 누가 있나요?
엄마? 아빠? 동생? 친구?
그렇다면 조용히 귓속말로 물어보세요.
"넌, 어느 별에서 왔니?"
동글이의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며 고민하던 즈음, 넷플릭스 신작 <고요의 바다>를 시청했습니다. 연가시와 바이러스 재난 영화를 합쳐놓은 것 같았고 평론가들은 혹평 일색이었지만 저는 볼만했습니다. 황폐해져 가는 지구, 생존의 문제 앞에서 이기적이 되어가는 인류, 우주 저 너머의 낙원을 찾아 떠나는 모험, 결국은 화해와 연대만이 해결책이라는 흔한 스토리, 뻔한 구성, 결말이었지요. 하지만 어쩌면 그 뻔하고 단순한 것이 최선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왕고구마에서 시작한 저의 글쓰기 고민은 동글이의 그림속 온갖 과일, 채소로 이어졌고 우주를 헤엄치다 결국은 사람에서 끝맺었습니다. 결국 인간 삶의 목적은 잘 먹고 잘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더불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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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읽으신 '해남고구마생산자협회'나 '동아시아 고구마협회' 홍보 담당자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 유엔경제사회이사회 산하 '지속가능개발위원회(UNCSD)'나 대한민국 '지속가능발전위원회'의 연락도 환영합니다.
- 모든 작물로 치환 가능한 동화입니다. '미국감자협회', '뉴질랜드키위협회', '태국망고농민조합'의 연락도 기다립니다.
- 특정 작물을 희화화한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 '한국딸기협회'에는 무상으로 홍보글 드리겠습니다. )
- 이상 행복한 상상을 담은 농담이었습니다~
6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 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다양한 글을 각각의 색으로 소개합니다. 주제는 그림책을 매개로 하여 선정됩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매일 한 편씩 소개됩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작가님들은 언제든지 제안하기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