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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an 29. 2022

고3 아버지의 눈과 귀

"오늘 우리 작은아들한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퇴근 후 줄곧 집안을 서성이던 남편이 은근슬쩍 제게 흘리고 간 말입니다.

"무슨 말인데?"

"이따 말할 때 들어~"

"엥? 뭔데~~ 말 안 해줄 거면서 왜 낚시질하는데~~"

궁금증만 가득 차오르게 해 놓고 남편은 또 아이방 앞을 서성거렸습니다. 대체 무슨 할 말이 있기에 저럴까 싶었고 결국 제가 아이를 불러 자리를 마련해줄 수밖에 없었죠. 이건 뭐, 맞선도 아니고...

"애기야~ 나와봐~ 아빠가 할 말이 있대~"

여전히 저희 집에서는 애기라고 불리는 열아홉 살 청년이 방에서 나왔습니다.


"여기 앉아봐. 아빠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아빠 친구가 하는 매장에 아르바이트생이 왔는데, 의대 재수를 준비하기 전에 잠깐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왔다는 거야. 아빠 친구가 물어봤대. 고등학교 때 사교육비가 얼마나 들었냐고. 그 친구 왈 한 달에 삼사 백정도 들었다고 하더래. 여보, 사교육비가 그렇게 많이 들어? 어쨌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너한테 참 고맙더라. 그거 반의 반도 안 되는 비용으로 잘해주고 있는 게 참 대견하면서 미안하기도 하고 고마웠어. 그 얘길 꼭 해주고 싶었어. 고마워~"


작은아이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아도 두 남자는 서로의 마음을 잘 아는 것 같았어요.

고3 아이에게 과목별 과외를 시켜주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그 정도의 사교육비를 감당하며 일 년을 버팁니다. 내신을 대비하면서 수능까지 함께 준비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이죠. 강남의 유명학원에서 아이 재수를 시킨 지인은 매달 오백만 원 이상이 들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독학재수학원에서 월 50으로 공부했던 큰 아이가 새삼 고마워지는 이야기였지요. 동시에, 강남 재수학원에 보내지 못한 미안함도 남았습니다. 저야 자주 듣는 이야기라 무뎌졌습니다만, 직장인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사교육비 지출이 흔한 일이라는 사실에 남편은 적잖이 당황했고 혼란스러웠던 모양입니다.



다음날, 남편은 또 다른 이야기를 물고 왔습니다.

"오늘 고3 수험생의 아버지를 만났거든? 미대 진학을 준비하는 아이를 위해 아빠가 다짐을 했대. 1년 동안 미술학원 등하원을 도와줘야겠다고 말이지. 아빠가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은데 그거라도 해야겠다고... 그런데 며칠 만에 그만둬야 했대."

"왜?"

"음주운전 걸려서 면허가 취소됐다지 뭐야."

"에고... 왜 그랬대..."

아이의 수험생활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했던 어느 아버지의 정성이 순식간에 좌절된 사연이었습니다. 아이의 등교와 학원 픽업을 돕고 있는 남편은 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각오를 다졌을지 모르겠습니다. 올 한 해, 자신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말입니다. 아이의 입시기 무사히 끝날 때까지 아빠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요.



성공적인 대입을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습니다.

조부모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 그리고 아빠의 무관심.

월 400 정도의 사교육비를 가뿐히 해결해주지 못하고 엄마만큼 입시에 대해 알지 못하는 아빠는 섣불리 끼어들어 혼란만 일으키느니 잠시 빠져있으라는 얘기였습니다. 갱년기만도 서러운데 이래저래 찬밥신세였던 거죠. 그도 그럴 것이, 십수 년간 아이의 교육에 관심도 없던 아빠들이 고3이 되면 갑자기 성적에 관심을 가지면서 가정불화가 시작된다는 얘기가 들렸습니다. '이 성적으로 어느 대학을 가냐, 당신은 지금까지 뭐한 거냐, 이러려고 내가 열심히 돈 벌었냐'는 아빠의 푸념은 가족 모두를 맥 빠지게 했겠죠. 누구 하나 빠짐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왔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고3의 아빠는 조용히 숨죽이기를 강요당해온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아버지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엄마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학부모 총회와 입시설명회에 참석하는 아버지의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학교 운영위원에도 적극 지원합니다. 자녀의 입시를 멀리서 숨죽이며 지켜보던 수준에서 벗어난 것이죠. 고3 때 갑자기 등장해 가족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원팀으로 움직입니다. 고3 때는 더욱 적극적으로 입시에 관여해 진로를 설계해주고 사회생활을 통해 갖게 된 통찰력으로 현실적이면서도 다양한 방안을 제시합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없죠.


매일 아침 아이의 등교를 도와주고 늦은 밤 학원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남편은 "조심스레 숟가락 좀 얹어보려고~"라고 소심하게 말합니다만, 실은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만한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실천하는 중입니다. 비싼 과외를 시킨다면 아이가 조금은 편하게 공부를 하지 않을까 안타까워하지만 여전히 해줄 수 있는 일은 운전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서글픈 현실에 좌절하기보다는, 절대 음주운전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현실적인 전략을 수행 중입니다.


아이를 가졌을 때는 임신부만 보였고 아이들 울음소리만 들렸습니다.

큰 아이가 군대를 가니 길거리에 군인만 보이고 군대의 각종 사건사고만 들립니다. 엄마에게만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려니 했죠.

작은 아이가 고3이 되니, 남편의 눈에 고3 수험생과 그들의 아버지만 보이고 그들의 이야기에만 귀가 반응하나 봅니다. 내일은 또 어떤 이야기와 고민을 듣고 흥분하며 달려와 전해줄까요. 나날이 귀여워지고 나날이 짠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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