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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Feb 21. 2022

만나고 싶은 어떤 날엔, 반드시 만나겠습니다.

이림 < 만나지 못한 말들 >

항상 그랬다.

내 인생이 뭣같이 느껴져 한없이 우울할 때를 기다렸다가 그녀들은 전화를 해왔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그들의 좌우명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통화를 하며 자신들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처절함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이야기였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내 말이 도움이 되기는 할지 알 수 없어 사이사이 적절한 추임새를 넣어주며 듣고 또 들어주었다. 그렇게 상대는 충분히 쏟아내고, 나는 얼마든 받아내고 나면 우리들의 통화는 막바지로 치달았다.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까 속 시원하네. 다음에 또 통화해~~ 먼저 전화 좀 하고 그래~"

내가 먼저 통화하는 일은 드물었다. 어디에 쏟아내는 것이 익숙지 않아서다. 내 전화를 기다리기는 할까 고민이 앞선 것도 이유였다. 자기 삶도 피곤한데 남의 삶 피곤한 이야기를 듣고 싶을까, 들어주는 건 나 하나로 족한 거 아닐까, 상대에게까지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먼저 통화하지 않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난 그녀들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굴곡 많은 삶을 엿들을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나마 내 삶은 낫구나,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겠구나, 내 고난은 고난도 아니구나... 덕분에 바닥을 쳤던 내 감정은 다시 야금야금 풍선을 불며 떠오르고 있었다. 그게 참 미안했다. 상대의 불행을 밟고 올라선 기분,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줄다리기 장면에서 살아남은 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들은 속시원히 풀어내서 살 것 같다고 했고 나는 그걸 이용해 살았다.


다시 죄책감에 빠졌다.

이림 작가님의 신작 < 만나지 못한 말들 >을 읽으면서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책을 읽었다. 삶이 참 녹록지 않다고 느끼던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온통 슬픔 투성이인 책을 만난 것이다. 가난, 알코올 중독 아버지, 어머님의 암 선고와 죽음, 아버지의 죽음, 남편과의 이혼...

감히 함부로 나의 삶을 작가의 삶과 비교하며 가슴을 쓸어내릴 수 없었다. 그건 안될 짓이었다. 따뜻한 거실 카펫 위에서 무릎담요까지 덮은 채 책을 읽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일었다. 옆에 와서 어깨동무해주는 남편을 책에게 들킬까 봐 걱정했다. 내가 줄 수 있는 위로가 없는 책, 그 속의 작가님이 생각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들어주었다. 아니 읽어주었다.

내게 전화를 걸어 몇십 분 동안 하소연을 하고는 그것만으로도 해소가 됐다며 홀가분하게 전화기 너머로 사라지던 그녀들처럼, 작가님도 다 털어냈으니 조금은 홀가분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게다가 작가 자신이 후회하는 많은 것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을 이들에게 다정한 당부를 하고 있으니 충실한 독자가 할 일은 작가가 당부한 대로 행동하는 것이리라.  


내일은, 내가 먼저 그녀들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실은 이보다 먼저 작가의 당부를 따른 것이 있다.

부모님을 어제에 남겨두고 나는 오늘을 산다. 내일이 오면 오늘처럼 또 이렇게 아무 일도 없는 듯 살게 되겠지. 내 곁의 빈자리는 내일도 그다음 날도 그대로 있으리라. 꼭 지녀야 할 소중한 물건처럼 그 빈자리와 함께 나아가는 것, 그것이 내게 주어진 삶이란 걸 이제 알 것 같다. 삶의 고비마다 그 자리를 바라보게 되리라는 것도. 빈자리가 그렇듯 후회라는 감정도 세월을 품으며 무게를 더하겠지. 그 모두를 껴안고 살아가는 것이 여기에 남겨진 나의 역할인 것 같다.  - p167

작가님의 타이밍은 또 한 번 기가 막혔다.

해마다 어김없이 아버지가 문자를 보내시는 날, 어머니에게 이른 아침 전화가 오는 날 이 문장들을 본 것이다. "축하한다. 아버지 딸로 와주어서 고맙고 행복했다. 가족들과 항상 건강하고 복 있게 잘 살아라."

"사랑하는 우리 큰딸. 미역국은 먹었어?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돈 조금 보냈어~"


평소처럼 낳아주셔서 감사하다, 덕분에 잘 크고 잘 살고 있다는 말씀이나 하고 끝날뻔했는데 작가님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책을 들고 나타나 주신 덕에 올해는 직접 찾아뵙기로 마음먹었다. 부모님이 좋아하는 시루떡을 만들어 서프라이즈~~ 하고 나타나야지, 때마침 일요일 오전이니 두 분 다 나른한 휴일을 보내고 계시겠지, 떡을 해다 드릴까 말까 고민만 하지 말고 바로 지금 생각났을 때 해드려야지...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며 떡을 했다. 아직 뜨거운 떡을 시루째 보자기에 싸들고 신이 나서 친정으로 향했다. 그제야 알았다. 오늘은 아버지의 문자도, 엄마의 전화도 오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뭐, 내가 먼저 감사 인사드릴 좋은 기회겠거니 했다. 친정이 가까워질 때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낳아주셔서 감사해요~"

"어? 아... 오늘 네 생일이지?"

"어머. 잊으신 거예요? 댁에 계세요? 저 곧 도착하는데."

"아빠 당진인데?"

"엥? 거긴 왜?"

"놀러 왔지~"

"아... 즐거운 시간 보내셔요~ 어머니는요?"

"몰라? 집에 있겠지?"


곧이어 어머니에게 여러 번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으셨다. 교회도 안 다니면서 일요일 아침 10시부터 대체 어디를 가신 거야, 혼자 구시렁거리며 친정집에 들어갔다. 고요했다. 부모님이 안 계신 친정집을 들어가는 일이 이렇게 어색한 일이었던가. 식탁 위에 떡을 올려두고 나오려다가 괜히 허전한 마음에 이방 저 방 문을 열어보았다. 텅 빈 침대를 괜히 훔쳐보고 냉장고도 한번 열어보고는 빠져나왔다. 훔칠 물건이 없어 빈손으로 나오는 도둑의 심정이 이럴까. 허전하고 섭섭했다.


괜찮다.

하마터면 무뚝뚝한 감사인사마저 전하지 못할 뻔했는데 작가님의 당부를 따른 덕에 아무것도 미루지 않았다.

엄마는 곧 들어와 떡 맛있다, 고맙다 하며 전화를 주셨고, 아버지는 내일 아침식사로 떡을 드실 거란다. 내 마음은 늦기 전에, 후회하기 전에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과 만났다.

그거면 됐다.

'어떤날엔' 작가님의 < 만나지 못한 말들 > 은 여기저기 퍼져나가 늦을 뻔한 만남들을 주선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님의 당부를 따르는 성실한 독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작가님 마음의 모든 말들이 어디든 닿기를, 삶의 무게가 조금은 덜어지기를... 독자의 그것이든, 작가님의 그것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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