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는 사람마다 긴 한숨을 토해냅니다. 과연 누구를 뽑아야 하냐며 간절하게 서로를 쳐다봅니다. '투표권을 포기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의미 있는 한 표를 행사하겠다는 의지가 보입니다. 다만 어떤 선택이 '의미'를 갖는지 모른다는 게 문제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허경영 후보를 선택하겠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돈 많이 주겠다는 사람을 뽑아버리겠다, 한 번쯤은 기회를 줘보자, 알고 보면 진짜 대단한 능력자일지 모른다 등 다양한 이유를 열거합니다.
1997년 15대 대선 0.2%
2007년 17대 대선 0.4%
허 후보가 출마했던 역대 대선을 보면 1%을 넘긴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작년 말 실시한 대통령 후보 호감도 조사에서 허 후보는 5%을 기록해 3.7%인 심상정 후보를 앞섰지요. 만일 실제 투표 결과에서 같은 결과가 나온다면 여의도는 큰 충격에 휩싸일 것이며 이것은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라고 남편은 말합니다. 국민들이 기존 정치에 얼마나 염증이 났는지를 보여주는 수치가 된다는 것이죠.
분명한 건 허경영을 찍게 되면 내 표는 사표(死票)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선자를 향하지 않은 표는 모두 사표가 되지요.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소신껏 투표를 합니다. 이 한 표의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허경영이라는 이름 옆에 찍힌 도장 하나는 '기성 정치에 대한 환멸'이라는 의미를 가진 사표가 되는 걸까요?
안철수 후보를 선택하겠다는 이들도 꽤 됩니다. 분명 당선이 되지 않을 것을 알지만 안 후보가 우습지 않을 정도의 득표를 했으면 한답니다. 그간 보여준 모습이 딱하기도 했고 제1야당을 향한 괘씸한 마음의 발로라고 합니다. 그들이 내민 한 표는 안 후보를 향한 '위로'이자 국민의 힘당을 향한 '흥칫뿡'의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이번 대통령 선거에 나온 후보는 총 14명입니다. 군소후보 8명은 여론조사에서 '기타 후보'로 묶여 모두 합해도 지지율이 2%가 안 나온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미미한 비율이지만 각 후보를 지지하는 국민들은 사표가 될 것을 알면서도 그 후보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들의 선택은 의미 있는 선택일까요?
며칠 전 중3학생들과의 수업시간이었습니다.
한 아이가 자가격리 중이라 수업에 못 오게 되자 나머지 아이들은 동요했고 어떻게든 다른 내용으로 수업을 하고 싶어 했지요. 불행히도 "선생님~ 첫사랑 얘기해주세요~"라는 질문은 안 하더군요. 아련하게 들려주려고 했더니... 대신 한 아이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대선 공보물을 꺼냈습니다.
"지난번에 선생님이 공약 한번 비교해보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우리 오늘 그거 하면 안 돼요? 혹시 몰라서 들고 왔어요."
이런 기특한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지요. 우리는 곧바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들어갔고 후보들의 <선거공보 및 10대 공약>을 확인했습니다. 한 명 한 명 일일이 들어가 읽어보았지요. 군소후보들의 공약도 보았습니다. 기본소득당의 대표는 아이들이 읽었던 <기본소득 쫌 아는 10대>라는 책의 저자여서 신기해했습니다. 어떤 후보의 공약은 아이들의 눈으로 보아도 실소를 금치 못하는 수준이었습니다.
14명 후보의 공약을 분야별로 정리해볼까 하다가 우리는 '후보별 공약 점수표'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개인마다 관심 있는 분야가 다르니 분야별 핵심 질문에 따른 점수를 매기기로 한 것이죠.
"너희가 심사위원이 되는 거야. 후보들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온 참가자인 거지."
각 후보의 도덕성 시비와 평판은 점수에서 제외하기로 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 말고 공약에만 집중하기로 했지요.
표는 간단했지만 아이들은 자신들이 궁금한 분야를 골라 질문을 만드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애써서 질문을 만들고 점수를 매기다가 갑자기 썼던 질문을 지우기도 했습니다.
"왜 그걸 다 지워?"
"질문을 너무 이상하게 만들었어요. 점수를 매길 수가 없어요."
"그렇지. 막연하고 추상적으로만 생각했다가 꼼꼼히 들여다보려고 하니 애초에 내 생각 자체가 구체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어른들도 이렇게 해보면 좋겠네. 그러면 선택이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 너희들도 다음 대통령 선거 때 꼭 다시 해보도록 해~ 그때는 너희 손으로 너희들의 대통령을 뽑아야 하니까."
"네? 뭐라고요? 다음 대통령 선거? 으아아악 그러네요. 그건 생각 못했어요. 아! 떨려~~"
후보가 너무 많아 완성하지 못한 채로 수업이 끝났습니다. 아이들의 점수표에서 최고 득점자가 누군지 확인하지 못했지요. 저는 이제부터 해보려고 합니다.
1. 경제, 국방, 교육, 청년, 부동산, 복지, 안전, 일자리, 문화... 다양한 분야중에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분야를 몇 개 정합니다.
2. 각 분야별로 후보에게 묻고 싶은 공통질문을 만듭니다.
3.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내가 만든 질문에 각 후보가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를 정책과 공약을 읽어보며 확인합니다.
4. 후보마다 0점부터 5점까지 점수를 매깁니다.
5. 질문마다 3,4번을 반복한 뒤 총점을 냅니다.
6. 동점자가 있을 시 다른 질문을 만들어 점수를 내고 비교합니다. (일종의 결선투표제)
어쨌든 최고점을 받은 한 명의 후보만이 남을텐데,제가 나온 점수대로 투표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소중한 한 표가 사표가 되더라도 그것이 가진 가치와 의미는 보다분명해질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