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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r 11. 2022

장맛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선거, 잔치는 끝났다.

한바탕 시끌벅적한 잔치를 끝낸 듯 허무함과 피곤함이 밀려온다. 누가 되었든 흥겨움만 남는 잔치였다면 좋으련만, 아직 그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듯하여 아쉽다.


마음이 허할 땐 술이나 잠보다도 일이 최고다.

휴대폰 첫 화면 < To do List >에서 며칠째 지우지 못한 일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완성하지 못하고 처박아둔 수업 PPT  몇 개를 마무리했고 시원하게 베란다 물청소도 했다. 가장 큰 일을 마지막으로 미뤄두었는데 지난해 담가 둔 된장과 간장을 항아리에서 꺼내 소분하는 일이었다.


올해 담글 메주는 벌써 2주 전에 받아두었건만 여태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항아리를 비워야 새 된장을 담그는데, 새 대통령과 함께 산뜻한 출발을 하고 싶었던 건지 선거날까지 미루었다. 무거운 마음을 털고자 오늘에야 일을 벌일 거였다면 서두를걸 그랬다며 혼자 구시렁거렸다.


꾸덕꾸덕 마른 윗 된장을 걷어내니 몽실몽실하고 갓난아기 똥색보다 약간 진한 된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 가득 퍼내어 이 그릇 저 그릇에 빈틈없이 담았다. 우리 식구만 먹는다면 3,4년은 거뜬히 먹을 양이지만, 1년치와 덧장 만들 만큼만 남겨둔 채 여기저기 나누고 털어버린다. 은근 인기가 많은 우리 집 된장, 간장을 대놓고 사 먹겠다며 더 많이 담그라는 이도 있지만 딱 한 말, 내가 맛나게 담글 수 있는 양까지만 욕심내고 만다.

 

매년 새로 담근 장을 전 해에 담근 장과 섞어두는 것이 덧장이다. 고유의 장맛을 이어가라는 의미이며 그렇게 하면 숙성된 맛이 좋다고 해서 의식 치르듯 하고 있다. 장을 담근 지 십 년 가까이 되는 동안 매해 조금씩 더해졌는데, 몇 년 전 딱 한해를 걸렀다. 바쁘다는 핑계로 된장 항아리를 돌보지 못한 그해, 구더기가 항아리 밖으로 뚝뚝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고는 몽땅 내다 버렸기 때문이다.


특별한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 일은 아니라고 겸손을 떨지만 은근한 관심이 필요한 일이 장 담그기다. 볕이 좋은 날에는 뚜껑을 열어놓아야 한다는데 정신줄 놓으면 비도 들어가고 파리가 알도 깐다. 유리로 된 항아리 뚜껑만 믿고 있어도 사달이 난다. 구수한 냄새를 따라 어떤 놈이든 미세한 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 망으로 항아리 입구를 덮은 뒤 고무줄로 고정하고 유리 뚜껑으로 한 번 더 꾹 닫아주어야 안심이 된다. 옹기는 숨 쉬면서 습도를 조절한다고 하니 항아리 겉면도 깨끗이 닦아주어야 한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항아리는 주인의 게으름뿐 아니라 날로 먹으려는 못된 심보의 상징이다.


투표를 끝냈으니 국민으로서 할 일은 다 끝났다고 손 털려는 마음 역시 못된 심보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데 말이다. 항아리에 메주를 넣고 소금물을 부었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달군 숯을 넣고 대추, 마른 고추를 넣었다고 해서 벌레가 안 꼬이는 게 아니다. 망으로 한번, 뚜껑으로 한번 덮었다고 해서, 깨끗이 닦아주었다고 해서 저절로 맛있는 된장이 되는 것도 아니다. 수시로 뚜껑을 열어 안을 확인하고 가끔씩은 손끝으로 찍어먹어보기도 해야 한다. 장맛이 변하는 건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장을 망치면 시판 장이라도 사 먹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정치는 잘못되면 대체재가 없다. 그러니 선거는 끝이 아니라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정치 무관심은 선거날 하루의 기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의 부재를 말한다. 속 시끄럽다고 리모컨 끄듯 신경까지 꺼버리면 안 된다. 앞으로 1년을 지켜보며 평가하고 그다음 1년, 또 1년, 그렇게 계속 돌봐야 한다. 그 어느 한해도 버리지 말고 덧장으로 쌓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훌륭하게 숙성된 장맛 같은 우리를 발견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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