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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r 18. 2022

노예 22년

"미야, 내가 아범 생일이어서 용돈을 좀 줬거든? 그런데 얘가 네 몫으로 전해주라고 한 것까지 다 갖겠다고 해서 내가 너한테 이렇게 전화를 했다. 하하하. 아무리 생각해도 너한테 고대로 안 가져다줄 것 같더라구. 호호호. 중간에 배달 사고가 날 것 같아. 네가 1년 동안 아범 밥해주느라 고생이 많아서 20만 원 줬으니까 꼭 받아라~"


팔순 노모의 병원 진료에 동행하느라 남편은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며칠 후면 막내아들의 생일이니 어머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겠죠. 가족들이랑 맛난 밥이라도 사 먹으라고 용돈을 쥐어주시면서 며느리 몫을 따로 챙겨주셨는데 장난기가 발동한 남편이 농담을 던졌던 것입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동참할 요량으로,

"어머님. 1년 밥값으로 20이요? 에이~ 그건 아니죠~"라고 대꾸를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어머님은 당신 하실 말씀만 하고 끊으신 후라 며느리의 말을 못 들으셨습니다. 며느리 사랑하는 어머님의 마음에 농담으로 화답하려던 기회를 잃었습니다.


아침을 잘 먹지 않는 남편은 출근길에 토마토나 음료 등을 챙겨나갑니다. 속이 거북하다고 거르는 날이 대부분이고 아침 밥상에 계란말이나 스팸, 누룽밥이 오르는 날엔 식욕이 동하는지 한 숟갈 뜨고 가기도 하죠. 며칠 전 출근 후, 전화로 아침을 안 먹어 배가 고프다는 투정을 하기에 어머님이 주신 20만 원이 생각나 한마디 던졌습니다.

"이건 아니지. 1년에 밥값으로 20만 원 받는데 아침까지 차리라는 건 너무하지 않나?  영화 <노예 12년>의 실사판인데? 노예 22년?"

이후로 '노예 22년'은 제 단골 멘트가 됐습니다.


남편 생일 당일, 생일 저녁상을 준비하다가 어머님의 20만 원이 또 생각났습니다. 아마도 당신 아들 생일에 미역국이라도 꼭 끓여달라는 부탁이시리라. 어느 해건 대충 넘어간 적은 없지만 올해는 돈도 받았으니 더 신경 쓰기로 했습니다.

전복 미역국, 왕갈비찜, 새우 미나리전, 당면만 잔뜩 넣은 잡채.

거기에 남편 친구가 깜짝 배달시켜준 족발.


"그렇게 차릴 필요 없어~ 할 일 많으면 내 생일상은 패스해도 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하소연하던 아내가 본인 생일상까지 차리는 게 미안했던 남편. 거기에 저는 또 농담으로 답했습니다.

"아니야. 20만 원어치는 차려야지. 1년 치 밥값 20만 원을 오늘 하루에 몰빵 할 거야. 하루치로 여겨야 덜 노예 같지."

노예 이야기에 둘은 또 한바탕 웃었습니다.


남편은 생일 밥상을 사진 찍어 어머님께 보냈습니다. 어머님은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라는 덕담을 보내셨지요. 자식이 많아 걱정이 많다는 어머님에게 막내아들의 생일 상은 걱정 하나 덜어내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어머님은 평소 제게 고맙다, 최고다라는 말을 아낌없이 해주십니다.

다음에 만나면 1년에 20만 원은 너무 한 거 아니냐고 투정 한번 부려봐야겠습니다.


...

그런 비난, 비판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아내가 남편 생일상 차리는 게 당연한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조선시대 같은 시추에이션이냐. 스스로 노예처럼 사는 게 자랑인 줄 아는 글을 쓰다니...'

진짜 노예라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글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생일상을 꼭 차려서 검사를 받아야 하는 삶이었다면 이런 글을 쓸 수는 없었을 겁니다.

내 의식은 깨어있으되 내 마음은 모두가 편하고 행복한 방향으로 열어두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을 따름입니다.

'이러다 언젠가 차리기 싫어지면 안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도 그렇게 생각할 테고요. 우리는 서로에게 꽤 쿨한 노예거든요. 어머님에게도 그렇게 말하겠죠. 20만 원 받으면서 생일상은 무리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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