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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r 23. 2022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봄

봄이면 떠오르는 사람

보글보글 글놀이
3월 4주 봄시리즈 세 번째 주제
"봄 사람"

1997년 3월 20일.

남자 친구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5년간의 암투병 끝이었다.

철없던 나는 삼일 밤낮 남자 친구의 곁을 지켜줬고 슬픔에 매몰됐던 그 나를 집에 보내지 않았다. 결혼도 안 한 사이, 남자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있느라 당장 집에 오라는 부모님의 불호령도 시한 딸이 되었다. 부모님은 배신감, 실망감에 꽤 오랫동안 나를 없는 사람 취급다.

남자 친구 나이 스물다섯, 내 나이 스물하나 봄의 일이다.


1997년 3월 26일.

신비롭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경험을 했다.

아직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남자 친구를 만나고 시청역에서 헤어져 집에 오던 길에 생긴 일이었다. 전철을 타는 나를 배웅하며 플랫폼에 서 있던 남자 친구는 손가락으로 내 앞에 앉아계신 중년의 신사 한 분을 가리키며 입모양으로 말을 했다.

"그분 신도림에서 내리실 것 같아. 거기에  앉아~~"

근거 없는 예언인 줄 알면서도 내심 기대하게 됐다. 다행히 안양역에서 신사분의 옆자리가 났고 거기에 앉았다.


버버리 코트에 모자를 쓰시고 월간조선을 읽고 계시던 신사분은 초면인 나에게 말을 거셨다. 나와 같은 대학 철학과를 1960년에 졸업하고 언론사에서 일하고 계시다고 했다. 학교라는 공통의 소재 덕에 짧은 시간 많은 대화를 나누며 까마득한 후배인 내게 고시 준비를 하라고 당부하셨다. 종착역인 수원에서 함께 내린 후 수원역 광장에서 헤어질 때, 그분은 명함과 함께 5만 원을 접어 내 손에 쥐어주셨다.

선배 중에는 좋은 사람들도 많다는 걸 기억하라시며, 지금 맛있는 걸 사주고 싶은데 밤이 늦었으니 이걸로 맛있는 것 사 먹으라고, 선배가 주는 용돈이니 부담 갖지 말고 받으라 하셨다. 낯선 사람의 과한 호의는 감당하기 힘든 벅참이 되었다. 횡재했다는 기분보다는 형용할 수 없는 신비로운 꿈을 꾼 것 같았다. 어쩌면 그분은 남자 친구의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생전에 밥 한 끼 사주지 못하고 병환이 짙은 몸으로 인사 한번 받은 게 전부인 막내아들의 여자친구에게 제대로 인사하고 싶으셨던 건 아니었을까... 그렇게 허무맹랑한 상상을 했다.


집에 오자마자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신비한 경험을 풀어놓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남자 친구 역시 차창안으로 보였던 신사분의 뒷모습에서 아버지를 보았다는 게 아닌가. 전철이 지나가고도 한참 동안이나 그 뒷모습이 잊히지 않았다고 했다. 여자 친구의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리움이 더 사무쳤을 테다.


우리는 앞으로, 늘 그렇게 아버지가 우리를 찾아와 살펴주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자고 다짐했다. 나쁜 짓 하지 말고 항상 바르고 참된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옆에서 돌봐주시는 것이라고, 힘들 때 손 내밀어 도움 주고 따뜻한 위로 건네는 이 있음을 잊지 말라고.


그해 말 IMF 외환위기로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회사가 부도를 맞아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남자 친구가 있어서 힘든 시기를 잘 견딜 수 있었고 전철에서 만났던 신사분, 혹은 돌아가신 아버님을 기억하며 용기를 잃지 않았다.


2022년 3월 20일

다락방에 올라가 1997년의 일기장을 찾았다. 빼곡히, 꼼꼼히 그날 일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 다이어리에는 신사분의 명함도 꽂혀 있었다. 기억으로만 존재하던 일이 아니라 기록으로도 남아있는 일이었다.

그분의 성함을 검색해보았다. 포털 메인 인물검색에 짠 하고 나타난 얼굴. 그분이다!

흑백사진 속 빵모자를 쓰고 계신 그분은, 시인이었다.


2022년 3월 21일

그날과 그분을 기억하느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우리가 가장 힘든 시기에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 살아갈 용기를 주셨던 신기한 인연과 1997년의 봄날을...

이제는 남편이 된, 남자 친구가 말했다.

"기억나지. 찾아볼까? 연락, 드려볼까?"

마흔다섯, 마흔아홉의 봄 이야기다...



기억이 아닌 기록... 실존인물...


* 어감상 '마흔다섯, 마흔아홉'을 사용했습니다. '마흔여섯, 쉰'은 영... 입에 붙질 않아서...



* 매거진의 이전 글, 최형식 작가님의 < 내 마음의 총천연색 >

* 매거진의 이전 글, 로운 작가님의 < 당신과 함께 보낸 서른다섯 번의 봄 > 


5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 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다양한 글을 각각의 색으로 소개합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매일 한 편씩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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