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Apr 08. 2022

어쨌든, 사랑

그녀가 누구게요~~

지하철을 타고 가기로 했어요. 그녀를 만나면 시간여행을 한 듯 대여섯 시간은 훌쩍 흘러버리거든요. 서울 한복판의 주차비 올라가는 소리에 귀 기울이느라 그녀의 말을 놓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어떤 가방을 들고 나서야 할지, 거기서부터 신경 쓰였어요. 평소에 들고 다니던, 필요해 보이는 모든 것을 때려 넣던 큰 가방을 포기하고 작은 백을 들었지요. 예뻐 보이고 싶었나 봐요. 지하철에서 읽고 싶은, 아니 실은 선물 받았다며 그녀에게 자랑하고 싶은 <계간 수필>, 길어질 만남을 대비한 보조배터리, 세련돼 보이는 선글라스가 들어가지 않더군요. 조금 더 크지만 얌전한 가방으로 바꾸었어요.


아들이 생일 때 사준 새 운동화를 신었다가 벗었어요. 그녀와 서울숲을 걷기로 했는데 새 신발 때문에 발이 아프면 안 되니까요. 조금은 지저분하지만 익숙하고 편안한 신발을 신었어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아뿔싸. 마스크를 벗고 나왔네요. 이런 일이 거의 없는데, 오늘은 마음이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마음은 이미 한참 전에 길을 나섰어요. 간밤에 꿈속에서부터 그녀를 만나러 갔거든요.

그녀와 저는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어요. 주변에 사람들도 많았지요. 포근하고 깨끗한 날이었어요.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어찌나 몽글몽글 예쁜 꽃송이 같지요. 그런데 갑자기 구름이 아주 빠른 속도로 흘러가기 시작했어요.

"작가님~ 구름 좀 봐요~ 너무 예쁘죠? 계곡물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은 처음 봐요~"

그녀와 저는 한참을 서서 구름을 감상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구름이, 아니 하늘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어요.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는 표현이 더 맞겠네요. 방금 전 구름이었던 것들이 하나 둘 덩어리째 쏟아져 내렸으니까요.

눈이 서서히 감기고 코끝에 낯선 향기가 몰려왔어요. 몸은 하늘로 붕 뜨기 시작했지요.

'아... 하늘이 무너지는 장면은 이렇게 아름다운 거였구나. 세상이 끝난다는 건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구나. 아이들과 남편도 세상 어디선가 지금 나와 같은 것을 보고 느끼고 서로를 생각하고 있겠구나. 다행이다. 우리 모두가 함께여서... 다행이다. 두렵거나 슬픈 감정이 아니라 기쁘고 행복한 마음이 가득해서...'


잠에서 깨어나 한참을 멍했어요. 꿈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었지요.

그녀를 만나 서울숲길에 들어섰을 때, 있는 줄도 몰랐던 꽃길이 펼쳐졌을 때. 모든 것이 설명됐어요. 꿈에서 봤던 꽃송이 같던 구름, 구름 같은 꽃송이가 거기에 있었거든요. 제 옆에는 그녀가 나란히 걷고 있었고 코끝에는 봄내음이 전해졌어요. 그러니 꿈도, 현실도 기쁘고 행복할 수밖에요...


그녀와 저의 종교는 같아요.

사랑.

오늘 만난 이유도 사랑을 전시한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간 거였어요. 사랑을 그린 만화와 사랑을 담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지요. 그녀는 '노년의 사랑'을 담은 섹션은 없다며 아쉬워했고 저는 그런 그녀가 참 귀여웠답니다. 그녀는 전시관 곳곳 눈길 닿는 곳을 향해 셔터를 눌렀고 저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먼저 전시회를 다녀온, 그녀를 닮은 어느 작가님은 사랑을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 사람이 버스에서 머리를 부딪치며 자고 있을 때 부딪치는 자리에 자기 손을 대고 있는 것.


저는 예전에 어떤 글에선가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이유 없이 좋은 게 사랑이라고.


오늘은 사랑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네요.

만나기 한참 전부터 이미 마음은 함께 있는 것.

열 발자국쯤은 뒤에 떨어져서 바라봐주는 것.

잠깐 마주했는데 이미 다섯 시간쯤 흘러가 버리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어쨌든, 사랑...



매거진의 이전글 끌브그슳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