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순대였습니다.
하루 종일 스터디 카페에서 공부를 하고 온 남편은 순대가 먹고 싶다고 했지요. 시켜줄까, 사다 줄까 물어보는 아내에게 당신 귀찮으니 됐다고 하면서도 이미 마음은 들킨 뒤였습니다.
"순대가 왜 이렇게 먹고 싶지?"
"당신, 철분이 부족한가보다."
"철분이 부족하면 순대가 땡겨?"
"난 그러던데? 한 달에 한번 그날이 되면 순대가 너무 먹고 싶던데?"
"아. 그래? 헌혈을 해서 그런가?"
뜬금없이 남편은 헌혈 이야기를 했습니다.
"헌혈? 당신이? 푸하하하. 핑계 댈 걸 대야지~ 20대 때도 피가 너무 찐득해서 헌혈이 안 됐던 사람이잖아. 평생 헌혈 해 본 적도 없으면서 무슨 헌혈 핑계를 대? 푸하하하"
배꼽을 잡고 웃는, 비아냥거리는 아내를 남편은 황당하게 쳐다봤습니다. 그러더니 책가방과 손가방을 뒤적거렸고 헌혈증을 회사 사무실 서랍에 두고 왔다고 했습니다.
"와~~ 당신 농담을 정말 정성들여 한다~ 아내를 그렇게 놀리니까 좋아? 그렇게 안 해도 순대 사다 줄 수 있어~"
남편은 제 말에 조용히 폰을 만지작거렸고 온라인상에 남겨진 자신의 헌혈 이력을 제 눈앞에 들이밀었습니다.
2022년 1월 26일 혈소판 헌혈
2022년 3월 17일 전혈
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남편의 헌혈은 명확한 사실, 박제된 역사였거든요.
자신의 생일을 맞아 3월에 헌혈을 했다고 했습니다.
"1월엔? 설마?"
네. 그랬습니다. 당시 브런치에서 혈소판 지정헌혈을 부탁하시던 작가님의 사연을 보자마자 달려가 헌혈을 했답니다. 해당 작가님께서 제 이름을 언급하며 댓글로 감사의 뜻을 전하셨다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저는 그 댓글을 보지 못했고 남편의 헌혈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남편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떠안고 있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타인의 삶에는 관심도 없는 줄 알았죠. 무엇을 나눈다는 것에 인색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내 것이 채워져야만 나누는 사람이라고 여겼죠. 그래서 교육자원봉사를 하는 제 자신이 큰 사치를 부리는 것처럼 보일까 조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학기 교육자원봉사가 끝나는 날, 아내를 위해 꽃을 사들고 오는 남편이었습니다.
경제적 고민은 자신이 할 테니 당신은 글을 쓰고 꽃을 구경하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내가 글에 첨부한 모르는 사람의 사연을 읽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 까다롭다는 지정헌혈을 했습니다.
그래 놓고는... 아내에게 자랑삼아 말할 만도 하건만,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순대가 먹고 싶다고 넌지시 말한 것입니다.
남편이 원하는 대로 '허파는 빼고 귀랑 간 많이 포함한 순대'를 주문해주었습니다. 순대를 오물오물 먹으며 휴대폰을 보고 낄낄 웃는 남편이 새삼스럽게 멋져 보였습니다. 정 많고 따뜻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습니다. 내 것이 채워지지 않았고 여유가 없을지라도, 갖고 있는 것만이라도 나누려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