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서 큰일을 다 보고 휴지걸이 덮개를 열었는데 누런 심만 남아있을 때의 당혹감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괜찮다. 욕실장에는 늘 여분의 휴지가 있기 마련이니까.
휴지 소비가 많은 우리 집은 욕실장으로는 감당이 안 되어서 화장실 문 앞에 작은 상자를 두었다. 30개들이 휴지를 상자 가득 넣어두어도 마지막 휴지까지 다 쓰는 날은 오게 마련이지만, 적어도 그 주기를 멀리 떨어뜨려놓을 수는 있다. 하필, 내가 걸리면 낭패지만 말이다.
상자 안에 휴지가 하나 남은 걸 발견하면 리필하는 것은 대부분 나의 몫이다. 장 봐온 휴지를 정리해 둔 사람이 나이기도 하거니와 자연스럽게 나의 몫이 되어버린 일이 많은 사람이 주부니까 말이다.
그런데 사람이니까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리필을 잊은 어느 날, 이야기는 시작된다.
큰일을 다 봤는데 휴지가 없었다. 상자 안 마지막 휴지를 확인한 게 3,4일 전이니 상자에도 휴지가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어라? 상자 위에 두루마리 휴지 하나가 곱게 놓여있었다. 마치 "내가 필요했지? 그럴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어~"라고 말하는 듯이 말이다.
없는 줄 알았는데 놓여있는 휴지. 자연스레 남편이 떠올랐다.
'세심한 사람 같으니라고. 마지막 휴지를 다 쓰고는 다음 사람을 생각해서 휴지 하나를 집안 어디서 찾아다가 여기에 올려놨구나?'
그러다가 갑자기 자가발전을 시작했다.
'참 내! 나는 평생 해왔던 일이잖아? 화장실 휴지가 끊이지 않았던 것, 깨끗이 빨아놓은 옷을 입을 수 있었던 것, 뭐가 필요하다고 하면 탁탁 찾아냈던 것. 그거 다 내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잖아. 가족들 삶의 시시콜콜한 부분을 책임지면서 생색 한 번 안 내고 살았는데 말이지... 어디, 휴지 하나 챙겨놨다고 생색만 내봐라! 글로써 만행을 낱낱이 까발리리라!'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하다가 종국에 남은 감정은 기쁨이었다. 글감이 생겼다는 기쁨! 휴지 하나에서도 이야기를 발견했다며 자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글로 쓰기 전에 사실 확인은 필수다. 없는 상황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화장실 앞 상자에 휴지 올려둔 것, 당신이야?"
"응!"
"왜? 휴지 떨어져서? 다음 사람 쓰라고?"
"아니? 화장대에 뭐 떨어져서 닦으려고 화장실 휴지 빼다 쓰고는 그냥 거기다 둔 건데?"
"아... 그렇구나..."
배려도 아니고 생색도 없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런 일상에서 대단한 글감을 뽑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글을 써야 한다는 집착이 낳은 과대망상, 무리한 설정이었던 것이다.
나는 왜 쓰는가.
무엇을 쓰고 싶은가.
글 하나를 쓰더라도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정성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보다가, 아무렴 어떠냐, 내 글이요 내 브런치인데 쓰고 싶은 것 원 없이 쓰는 게 뭐 어떠냐 내질러도 본다. 오늘도 억지스러운 소재를 하나 물어다가 펼쳐놓은 것은 아닌지 반성을 하다가, 인생이 원래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게 아니겠는가 변명도 해본다. 화장실 휴지가 똑 떨어지는 것처럼 글감이 똑 떨어지더라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지 않겠나 하는 시답잖은 상상도 해본다. 아무것도 없으면 양말이라도 벗어서 뒤처리 하는 사람처럼, 뭐라도 찾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