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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un 04. 2022

검정 예찬

빨래를 널었다. 흰색 면티만 건조대 가득이었다.

한여름이면 티셔츠가 푹푹 젖을 정도로 땀을 많이 흘리는 남편은 흰 티셔츠만 입었다. 다한증은 불치병이라 침을 맞고 약을 먹어도 소용없다고 했다. 할 수 있는 것은 티셔츠를 자주 갈아입는 것뿐.


남편이 흰색 셔츠, 흰색 티셔츠만 입은 것은 긴팔 셔츠에 정장까지 제대로 갖춰 입어야 했던 직장인 시절부터였을거다. 회색이나 푸른색 계열의 옷은 입을 수가 없었다. 겨드랑이뿐 아니라 가슴, 등 가리지 않고 젖어버려 흉한 꼴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흰색 상의에 문제가 있었다. 조금만 뭐가 묻어도 티가 많이 나고 금세 누렇게 찌든다는 것.

밥을 먹다 튄 김치 국물이 도드라지는 건 예사였고 땀에 절은 티셔츠는 금세 누래졌다. 강력한 세제도 써보고, 과탄산소다, 베이킹소다, 심지어 락스까지 사용해봤지만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싼 면티를 사서 자주 갈아주는 방법을 쓰기도 했지만, 싼 티셔츠는 목이 금세 늘어져 흉했다. 이래저래 흰색 상의는 성가셨다.


2년 전부터 찾아낸 해결책은 '검정'이었다.

땀에 젖은 흰색 상의는 몸에 찰싹 붙어 민망해지기 일쑤였는데 검정 상의는 젖어도 티가 잘 안 났다. 게다가 음식을 줄줄 흘리는 주인의 칠칠맞음도 가려주었다. 어떤 옷과도 잘 어울렸고 심지어 검은색은 세련된 색상으로 통하니 흰색의 해결사로 검정은 제격이었다.



흰색은 제 한 몸 돋보이기 위해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색이다. 작은 티끌이라도 흔적을 남기는 날이면 흰색은 종일 뾰로통해져서는 그 바탕의 한가운데에 티끌을 세워놓고 인민재판을 열어버린다. 뒤끝 한번 긴 흰색은 한번 들러붙은 불청객을 잡아두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순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세심하고 빡센 노동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빨고 삶고 표백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도 원래의 흰색으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두고두고 비난하다가 함께 자멸해버리는, 지랄 맞은 색.  

흰색이 순수하다는 것은 얼마나 터무니없는가.


반면 검정은 그 모든 티끌과 흔적을 너그럽게 품는다. 빛조차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잡아두는 블랙홀처럼 검정은 모든 색을 제 안에 수렴한다. 흰색 페인트를 작정하고 칠하지 않는 이상 검정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줏대 없는 색이 된다. 그 줏대 없음이 모두의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다. 내편 네 편 가리지 않고 온몸으로 모두를 받아들이는 색. 강렬하고 고집스러워 보이지만 배려, 타협, 공감이 가득한 색.  

진정한 순수란 이런 게 아닐까.



또 한 번의 선거가 끝났다.

이기고 지는 것만이 중요했던 전쟁의 상흔으로 온 나라가 만신창이가 된, 2022년의 상반기가 끝나간다. 각자 "우리가 가장 깨끗하다. 우리만이 순수하고 무결한 흰색이다!"를 외치며 조금의 다름에도 몸서리쳤다.

세대, 성별, 이념, 지역 등으로 갈라 집착을 넘어선 광기에 가까운 편 가르기 때문에 모두가 자멸해버릴 판이다.


차라리, 검게 물들이는 게 어떨까.

뭐가 묻었네 어쨌네, 네가 더럽네, 아니네 네가 더 더럽네 하는 일 없이 맘껏 부대끼고 얼싸안을 수 있게 모두가 검정이 되는 것.


빨래를 넌다.

건조대를 가득 채운 검정 티셔츠에 흰 먼지가 도드라보인다. 

결국, 흰색이나 검정이나 서로를 품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다. 그 놈이 그 놈, 그 색이 그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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