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가 휴지로 막혔는데, 내가 잘 뚫었어."
한참만에 화장실에서 나온 작은 아이가 개선장군처럼 말했습니다.
"세제로 한번 닦았지?"
"아니? 그냥 물만 뿌렸는데?"
"에이... 세제 뿌려서 솔로 한 번 닦지..."
"아직 그 경지까지는... 엄두가 안 나는 일이야."
"뭐래? 어려울 게 뭐야? 세제 뿌리고 솔 들고 쓱쓱 닦으면 되는데?"
"접근성이 떨어지는데?"
"변기 옆에 솔이랑 세제가 다 있는데 무슨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거야?"
"그 일에 대한 나의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헤헤헤"
"푸하하하. OO아! 그냥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해~ 무슨 접근성이란 단어를 들먹이냐?"
초등학교 때부터 화장실 청소를 해왔던 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싫었기 때문일까요? 제 아이들에게는 화장실 청소를 시켜본 적이 없습니다. 솔로 변기 닦는 간단한 것조차 엄두를 못 내다니... '접근성'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손사래를 치고 기겁을 하다니... 가정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더군요.
며칠 전, 부엌에서 일을 하던 도중 발 밑에서 검은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닐봉지 쪼가리가 떨어졌나 하고 무심히 쳐다봤다가 기겁을 하고 소리를 빽 질렀지요. 이 집에서 처음, 아니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란 바퀴벌레였습니다. 훤한 대낮에, 그것도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부엌 한가운데에 있을 녀석이 아닌 걸로 아는데 말이죠. 방금 뜯었던 택배박스에 묻어 들어왔을까, 좀 전에 다녀간 매트리스 케어 기사분의 짐에 딸려 들어온 걸까 애꿎은 피의자만 만들어내다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놀란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어 싱크대 위에 있던 빈 와인병을 그 녀석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와인병 바닥의 움푹 파인 곳에 가두어둔 것이지요. 마침 제 비명에 놀라 방에서 뛰쳐나온 작은아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네가 잡아줘. 엄만 한 번도 바퀴벌레를 잡아본 적이 없어."
"으으으.... 나도 무서운데? 나... 못 잡는데?"
"그럼 어떻게 해~~ 엄청 크던데..."
"난 접근성 떨어지는데?"
"와... 또 그 소리야? 아우... 난 몰라..."
결국, '접근성 좋은' 제가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와인병을 살짝 기울여 녀석을 향해 살충제 반통을 뿌린 후 두루마리 화장지를 최대한 두껍게 만들어 녀석을 잡았습니다. 반밖에 채우지 않은 쓰레기봉투에 화장지를 넣고 봉투 안에 살충제를 잔뜩 뿌린 뒤 봉투를 야무지게 묶어 그 길로 쓰레기장을 향해 내달렸지요. 이 모든 걸 하는데 채 5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마음으로 부엌 바닥 구석구석을 다시 살폈습니다. 다행히도, 대낮 부엌 한가운데, 사람 발 옆에 자리 잡고 앉아있을 만큼 대범한, 아니 정신 나간 녀석은 그놈 하나였나 봅니다.
'이 집안의 구석구석, 변기부터 바퀴까지 접근성이 좋은 사람은 나 하나구나.'
무슨 일이든 씩씩하게 해내는 엄마이고 싶었고 아이들은 곱게만 키우고 싶었는데 그러다 보니 나만 접근성 좋은 사람으로 남아버렸습니다.
약간은 공허하면서 약간은 씁쓸한 그놈의 접근성.
자꾸 쓰다 보니 입에 탁 붙는 '접근성'...
접근금지명령 받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