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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Nov 04. 2019

D-100 프로젝트 < D-55 >

사람은 '언젠가' 죽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죽을 수 있다.( 키키 키린 )               

100일 후에 죽는다고 생각하고 살면 하루가,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다.


지난 추석 때 선물 들어온 생돌김 세 톳이 냉동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미김을 사 먹던 터라 생김은 애물단지가 됐다. 주기적으로 냉장고 파먹기를 해도 김은 다시 냉동실로 되돌아갔었는데, 이제는 미룰 수가 없었다. 55일밖에 안 남았으니 거추장스러운 음식들도 부지런히 먹어 치워야 한다.


30여 장을 꺼냈다. 포도씨유와 들기름을 반반 섞어 기름 솔로 살짝살짝 바른다. 가는소금을 솔솔솔솔 조금만 뿌린다. 커다란 프라이팬을 약불에 예열하고 한 장 한 장 뒤집어가며 굽는다. 잘 구워진 김을 가위로 먹기 좋게 잘라 밀폐용기에 담는다. 커다란 통으로 두통이 꽉 차니 갑자기 든든하다. 든든하지만 아까운 시간이다. 냉동실에 있는 저 생김들을 얼른 처분하고 조미김을 사 먹으리라...


신혼초 어머님이 하셨던 말씀.

"아이고, 요즘은 조미김 사 먹으면 그만이지만, 우리 땐 어디 그런 게 있었냐? 그냥 하나하나 다 재서 구워 먹었지... 저녁 내 만들어서 큰 통으로 두통 채워놓았는데, 아침밥 차리려고 나오면 싹 비워져 있었어. 우리 집에 범인은 딱 한 사람이야! 네 남편. 김을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은 첨 봤어~~ 구워놓기가 무서웠다니깐~? 요즘은 세상 얼마나 좋냐? 다 구워서 나오고"

"나 때는 일도일도 엄청나게 많이 했지. 애들은 다섯이나 되지, 도시락 싸려면 새벽같이 일어나서 도대체 몇 개야? 명절 되면 또 어떻고? 아버지 회사 사람들이 명절이라고 갈비를 사 오면 손질하기 싫어서 다 동네 사람들 나눠줬다. 그렇게 나눠주고도 몇 다라이를 해댔는지... 지금 요만큼 하는 게 뭐 일이간?"


김 하나 구웠을 뿐인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어머님에게로 이어졌다.


어머님은, 그러니까 나의 시어머님은, 지금은 한없이 좋으신 분이다. 잔소리도 없으시고, 날 너무 이뻐하셔서 "나는 너만 믿고 산다~ 애미때문에 걱정 하나도 안 한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신다. 팔순의 시어머니는 이제 한없이 가엾고 애달픈 존재다. 자나 깨나 오 남매인 자식 걱정에 손주들 걱정까지...

원래도 좋으신 분이셨겠지만 난 어린 며느리였고, 서로 맞추기까지는 알게 모르게 맘고생의 시간이 있었다.


첫아이 임신 중이던 어느 명절엔가,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잠시 누워 있는데 "무슨 일을 그렇게 많이 했다고 누워있냐?"라고 하셨던 것.

아버님 기일에 내가 손수 만들어간 떡은 뒷베란다로 내놓으시고 장 본다고 나가셔서 떡 사 오신 것.

또..... 또.....또......

예전에는 섭섭한 게 아주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밖에 생각이 안 나는 걸 보면 세월에, 혹은 어머님과의 정 때문에 희석이 되었나 보다. 분명 눈물을 훔친 적도 있는 것 같은데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머니, 누이, 댁이라면 모두 싫어서 금치도 안 먹는다는 얘기도 있건만, 구박하는 시어머니도, 얄미운 시누이도 없었다. 모두들 집안의 막내라며 이뻐해 주셨고 반찬 하나만 해도 칭찬을 해주셨다. 큰 복이다.


남편과 갈등이 있던 시절에는 "너는 네 집에 잘하면 되고, 나는 내 집에 잘하면 된다."라고 다짐했었다. 욕먹지 않을 만큼만, 기본만 하자 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남편의 집이 아닌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맘 쓰게 되고, 그 맘을 알아주시고...

살갑지는 않지만 한결같은 며느리, 묵묵히 제 할 일 하는 며느리를 든든하게 생각해주셨다.


사실은, 김을 굽다가 어머님의 "나 때는 말이야~"라는 얘기가 생각난 김에 흠씬 시댁 욕을 풀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 생각이 안 난다.

몹쓸 기억력 때문이라면 그 또한 축복이고,

시댁 식구들에게 받은 사랑 때문이라면...

그 역시 더한 축복이다.



그나저나...

김굽다가...

갑분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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