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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ul 08. 2022

다정함과 환대가 가득한 날

이른 무더위에 정신을 못 차리겠더니 어젯밤, 오늘 아침엔 선풍기를 틀지 않았는데도 버틸만하네요. 아니면 오늘이 교육자원봉사 1학기 마지막 날이라 개운한 걸까요? 하하...


이번 학기에도 디베이트팀에 작년만큼의 봉사 신청이 들어왔습니다.

3개 초등학교, 13개 학급, 350여 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총 92시간 동안 다섯 명의 봉사자가 활동했지요. 그중 저는 24시간을 담당했습니다. 한 달을 꼬박 봉사에 썼다고 생각했는데 딱 하루밖에 안 되는 합산시간을 보니 조금은 허탈한 마음이 듭니다. 1월부터 5월까지의 준비시간을 생각하면, 밑지는 장사를 한 기분이랄까요? 봉사하는 사람이 참, 바라는 것도 많네요.


교육자원봉사의 이름으로 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디베이트를 가르치는 이 활동이 늘 보람차고 언제나 가슴 벅찬 일이라고 말하기 힘듭니다. 기운 빠지는 일,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일이 수시로 발생하거든요.


* 맑고 밝고 적극적인 아이들

학교에는 그런 아이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곤 합니다. 같은 부모의 영향을 받은 두 아들도 기질이나 성격이 180도 다르다는 것을 경험하고도 말이죠. 한 교실에 앉아있는 27~8명의 아이들이 모두 제각각이라는 사실을 아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첫 수업이 끝나고 교실문을 나서는 저와 봉사 선생님들의 기진맥진한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죠.

"글씨 좀 크게 똑바로 써주면 안 돼요? 아이씨."라는 아이의 말은 귀여운 수준입니다. 슬쩍슬쩍 눈치를 보면서 그림 그리는 아이, 몸이 반쯤은 뒤로 돌아가 쉼 없이 떠드는 아이, 물 좀 마시겠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수시로 들락날락거리는 아이들... 온갖 주문과 요구사항을 들어주다 보면 학교 선생님들을 향한 경외심이 가득 차오릅니다.


며칠 전 어느 초등학교에서 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4회 차 마지막 수업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네 번쯤 만나면 아이들은 제게 느긋한 마음이 됩니다. 친숙해지는 것까지는 좋은데 선을 넘는 일이 발생하지요. 예를 들면 자기네 팀 디베이트 실습이 끝났다고 해서 다른 팀 디베이트 시간에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처럼요. 대부분의 경우 어르고 달래며 넘어갑니다. 단발성으로 방문한 제가 아이들을 혼내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그날은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한 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디베이트 실습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디베이트를 통해 상대를 이해하고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는 삶을 살자고 얘기했잖아요. 게다가 이번 주제는 청소년 범죄 처벌 강화에 관한 거고요. 우리 팀 토론이 끝났다고 다른 팀 토론 시간을 방해하는 건 같은 반 친구들에 대한 배려심이 전혀 없는 것 아닌가요? 이 작은 교실 안에서도 서로를 배려하지 않는데 이런 거창한 주제가 무슨 의미가 있죠? 그래도 계속 수업을 이어나가야 할까요?"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이내 정숙해졌습니다. 남은 시간 차분한 분위기에서 수업을 이어나갔고 끝난 후에는 제 짐을 정리해주기까지 했죠. 첫 수업을 들어갔을 때, "선생님~~ 작년에도 오셨던 거 기억나요~ 이번에도 얼마나 기대가 큰지 몰라요~"하던 학생들의 열렬한 마음을 다시 확인하고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는 맑고 밝고 적극적인 아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아이들이 더 많다고 저를 다독입니다.



* 열정적이고 배려 깊은 선생님들

교육자원봉사자는 학생들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초등학교의 경우 각 반의 담임선생님과도 협업을 이루어야 하죠. 정규 교과시간에 수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담임선생님이 교실 내에 함께 계셔야 합니다. 대부분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시는 경우가 많지요. 업무를 보시는 중간중간 아이들의 표정과 태도를 확인하면서 눈짓으로 경고를 주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장난이 심한 아이는 조용히 밖으로 불러내 대화를 하고 들여보내기도 하시죠. 적극적인 선생님은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글쓰기를 함께 봐주기도 합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기본적으로 담임선생님들을 존경합니다만, 선생님도 사람인지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가 교실에 들어감과 동시에 교실을 빠져나가는 분, 수업시간 내내 소독제와 티슈를 들고 여기저기 청소하시는 분, 수업 중간중간 끼어들어 아이들을 대신해 질문공세를 하시는 분, 뒤에 앉아 꾸벅꾸벅 조시는 분...

지인인 학교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학교에 외부강사가 들어오는 게 너무 싫다고요. 지금까지 아이들과 맞춰온 교실의 규칙, 분위기라는 것이 있는데 외부강사가 한번 들어오면 그 모든 게 흐트러져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이죠. 그 이야기를 들으니 교육자원봉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일이 어쩌면 민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에게는 교육자원봉사자가 불청객에 불과할 수도 있구요.


봉사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책임이란, 상대가 원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할 책임이지요. 봉사했다는 만족감에 도취되어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고 하지만 담임선생님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래저래 고민할 게 많아 서서히 지쳐가던 1학기였습니다. 잘하고 있는 건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도 밀려왔고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아이들과 선생님을 만나며 기쁨과 고단함을 동시에 쌓아가던 중, 지금껏 만나본 적 없는 최고의 순간을 마주했습니다.

2차시씩 4회를 기준으로 진행하는 디베이트 수업을 2차시씩 2회만 신청한 학교가 있었습니다. 집에서 멀기도 했고 끝나고 나면 다른 학교로 빠르게 이동해 5,6교시 수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망설였지요. 하지만 얼굴도 뵌 적 없는 선생님의 다정한 문자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끌려 봉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바른 자세, 반짝반짝 빛을 내며 저만 바라보는 눈동자, 질문에 서슴없이 손을 들고 또박또박 답을 하는 야무진 입, 일사불란하게 입안문을 쓰는 손, 예의 바르고 정숙한 분위기.

활동지 가득 정성들여 쓴 입안문과 곳곳에 붙은 근거 자료 메모지, 팀별 숙의 시간마다 한데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진지함.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마친 아이들의 수업은 빈틈없이 알차게 채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늘 시간에 쫓기듯 형식만 알려주기에 급급했던 저였는데, 중간중간 아이들의 주장과 근거, 반박, 교차질의에 대해 꼼꼼히 지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지요.


보통 아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 담임 선생님이 엄하기 마련인데, 이 반은 예외였습니다.

시종일관 따뜻하고 다정한 말투와 눈빛, 차분하지만 부지런한 걸음걸이를 가진 분이었지요. 게다가 수업시간 내내 뒷자리에 앉아 제가 하는 말, 아이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모두 적고 계셨습니다.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들의 말에 감동하는 모습도 제 눈에 모두 담겼지요. 하지만 가장 감동스러웠던 것은 두 차례의 수업이 모두 끝난 후였습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면 저는 다음 수업 준비로 분주한 담임선생님에게 누가 될까 싶어 황급히 짐을 싸서 나옵니다. "여러분에게 뜻깊은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또 만나요~"같은 마무리 인사말을 속사포처럼 던지지요.

이번에도 급히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 찰나, 선생님이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향해 말했죠.

"얘들아~ 잠시만 집중하자~ 우리한테 이렇게 최고의 명강의를 해주신 디베이트 선생님께 마무리 인사를 드리자. 너희들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귀한 수업을 들은 거야. 그것도 교육자원봉사로. 그러니 선생님께 제대로 마지막 인사를 드려야겠지?"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아이들은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를 외쳤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선생님은 또 마음을 나눠주셨습니다.

"강사님~  꼼꼼하게 지도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덕분에 저도 많이 공부했네요.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2학기에 '선한 사마리안 법'을 주제로 토론 수업이 있는데, 그때는 제가 잘 진행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연구실에 시원한 음료를 준비해두었으니 그것 꼭 드시고 가셔요~ "


교육자원봉사뿐 아니라 2017년부터 디베이트 강사로 해왔던 모든 학교 수업을 통틀어 최고의 수업,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금전적 보상을 비롯한 어떤 혜택보다도, 나의 수고를 알아주고 디베이트의 가치를 알아주는 이들의 한마디가 큰 위로와 격려로 다가온 것이죠. 저를 가득 채워준 그 다정함과 환대 덕에 1학기 동안 쌓였던 모든 고단함과 섭섭함이 녹아내렸고 아마도 몇 년간은 이 약효가, 이 그득한 마음이 지속되지 않을까 합니다.  


죽을 듯한 무더위가 계속되다가도 가끔씩은, 여름도 쉬어가는 오늘 같은 다정한 날이 우리의 삶에는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살아볼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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