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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Aug 10. 2022

그 시절, 우리의 여름.

8월의 크리스마스

올여름엔 예년보다 이른 무더위에, 예년보다 더 많은 비가 극성이네요. 맞바람이 치면 그럭저럭 버틸만해서 더위가 절정인 열흘 정도만 에어컨을 켜던 우리 집인데, 올해는 '더워서, 습해서, 수험생이 더울까 봐, 밥 먹을 때라도 시원해야 하니까'등 갖은 핑계를 대며 수시로 틀어대는 중입니다. 방마다 비치해 놓은 선풍기로도 모자라 '엄마 전용' 휴대용 무선 선풍기도 장만했지요. 그런데도 식사 준비를 하면 땀으로 샤워를 합니다. 어렸을 적,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도 한 대밖에 없던 시절엔 어떻게 버텼나 기억을 더듬게 되더군요.


...

기습적인 폭우로 서울과 수도권 일대에 물난리가 났습니다. 곳곳이 침수되었고 슬픈 소식도 들려왔지요.

아버지 사업이 기울어 반지하방에 살았던 때, 장맛비가 흘러들어오려 하자 현관 앞에서 기를 쓰고 물을 퍼내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떠오릅니다. 결국은 집을 사수하고 몇 날 며칠을 몸져누워 서글퍼했던 어머니와, 그 모습에 더 서글펐을 아버지. 제가 중학생이었던 어느 해 여름은 그렇게 서늘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보다 몇 년 전인 초등학생 시절, 휴가철이 되면 동네 친목회 일곱 가족이 함께 휴가를 떠났습니다. 자가용 일곱 대가 줄줄이 꼬리를 물고 4박 5일 일정으로 길을 나서면 가는 날 10시간 오는 날 10시간은 기본으로 잡아야 했지요. 

오대산 계곡에 자리를 잡고 집집마다 텐트를 쳤습니다. 텐트 가운데에 마련한 공동주방에서 매끼 백숙이며 고기를 성대하게 차려내던 아버지들이 떠오릅니다. 부모님들은 식사와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 온종일 화투를 치셨지요. 그러다 열받으면 계곡으로 내려와 물속에 몸을 담그기도 했습니다. 

14명에 이르는 어린이들은 계곡 위아래를 넘나들며 종일 물놀이를 했지요. 수영복이랄 것도 없었고 아쿠아 슈즈도 없었어요. 알록달록 팬티에 흰 러닝만 걸친 채 맨발로 종횡무진하니 밤에는 더위도 잊은 채 쓰러져 잠이 들었지요. 어른 아이 모두에게 먹는 것과 노는 것만 중요했던, '찐 휴가'가 아니었나...


짧은 휴가 후 돌아온 일상은 더 덥고 지치기 마련입니다. 방학인 아이들이야 그날이 그날이었겠지만 부모님은 더 힘드셨겠죠. 조금만 견뎌보자며 안간힘을 썼을 겁니다. 

"오늘 밤.... 할까?"

"그래. 하자!"

두 분이 이렇게 결심을 한 날 밤, 단층집 옥상에 살림이 차려집니다. 

빗자루로 옥상을 정성스레 청소한 아버지는 거실에 깔아놓았던 화문석을 옥상 한가운데로 옮깁니다. 그것만 옮기느냐. 거실에 있던 TV도 옮기지요. 길게 연결한 TV 전원 코드를 아버지가 옥상에서 내려주면 저는 거실 창문에 붙어있다가 낚아채 콘센트에 꽂습니다. 옥상에 설치됐던 안테나와 TV를 직접 연결하면 준비 완료. 드디어 옥상 한가운데에서 TV를 보는 진풍경이 펼쳐지죠. 아버지는 목침을 베고 화문석에 누워 저녁 식사 전까지 TV를 보며 살짝 선잠에 빠집니다. 


저녁 식사 준비를 마친 어머니가 화문석 위에 밥상을 펴고 쟁반에 반찬을 잔뜩 담아 옥상으로 나릅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얼음 동동 띄운 오이미역냉국을 먹으며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에서 TV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지요. '우리 집은 옥상에서 TV 본다~~ 밥도 옥상에서 먹는다~'라며 온 동네 떠나가라 자랑을 했던 것도 같습니다. 


밤이 깊어지면 아버지는 TV를 주섬주섬 챙겨 거실로 옮기고 어머니와 저, 동생은 집으로 내려갑니다. 아버지는 옥상에 끝까지 남아 거기서 잠들 채비를 합니다. 빨랫대에 모기장을 달아 화문석 위로 늘어뜨려 그 안에 쏙 들어가죠. 바람 한점 안부는 날도 많았지만 선풍기 한 대에 의지해 다닥다닥 붙어 자는 집보다는 시원하고, 무엇보다 낭만적이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귀찮음을 무릅쓰고 며칠을 더 오르락내리락, TV를 연결했다가 해체했다가 하며 그렇게 보냈을 테죠. 

갑자기 차가워진 새벽 공기 때문에 옥상에서 주무시던 아버지가 화문석과 목침을 주섬주섬 챙겨 집으로 들어오면, 여름은 끝난 겁니다. 지나고 나면 견딜만했고, 힘들었던 기억은 희미해지기 마련이지요. 그러니 또 여름이 찾아와도 좋았던 것만 기억하며 다시 옥상에 TV를 연결하고 밥상을 차리고 했을 겁니다. 


외숙모가 양품점을 하셨던 덕에, 우리 집엔 미제, 일제 용품이 종종 생기곤 했습니다. 그중 아직까지도 사용하고 있는 물건이 있으니 '곰돌이 빙수기'가 그것이죠. 

얼음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곰돌이 눈이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얼음을 갑니다. 나름, 입자 크기도 조절할 수 있었고 제법 잘 만들어졌지요. 직접 삶은 팥을 넣고 젤리와 떡을 넣은 뒤 미숫가루를 뿌리면 이가 시리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빙수가 만들어졌습니다. 실험정신을 발휘해 야쿠르트도 넣어보고 수박도 넣어가며 놀이 삼아 만들어 먹다 보면 그럭저럭 여름이 끝나갔습니다. 

물건을 곱게 쓰는 어머니는 그걸 잘 보관했다가 결혼하는 저에게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몇 년 동안 빙수를 잘 만들어먹던 저는 결혼한 동생에게 물려주었죠. 최소 35년은 넘었을 곰돌이 빙수 덕분에 삼대가 여름을 시원하게 난 셈입니다.


그 시절 여름엔 정전이 참 잦았습니다. 

후덥지근한 밤 정전이 되면 모기가 물건 말건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창틀에 앉습니다. 전기가 다시 들어올 때까지 어머니가 나눠준 초 하나씩을 들고서 저마다 알고 있는 무서운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했고 그러다가 괜히 경건해져서 속엣말도 하게 되던 밤입니다. 온 동네가 칠흑같이 어둡고 소리마저 어둠에 빨려 들어간 듯 고요한 밤, 집집마다 창문 앞에서 흔들거리는 촛불을 보고 있노라면 흡사 크리스마스 같았지요. 선풍기도 없고 모기에 뜯기는 줄도 모르며 촛불 앞에 모여 두런두런 얘기 나누다 보면 조금은 시원해진 것 같기도 하고 여름도 별것 아닌 것 같고, 세상은 그럭저럭 살만한 것 같이 느껴지고... 그랬지요. 어린 마음에도 그랬습니다. 


우리의 오늘도, 이 여름도 그럴 겁니다. 



* 매거진의 이전 글, 김장훈 작가님의 < 외열내랭. 밖은 덥지만 마음이라도 시원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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