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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Oct 05. 2022

가만히 바쁜 너에게

보글보글 매거진 10월 1주 차 글놀이 - 나에게 쓰는 편지 -

사랑하는 늘봄유정에게


이 편지를 무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러브레터일까 회고록일까. 따끔한 충고일까, 따뜻한 위로일까. 소파에 누워 스도쿠 게임을 하는 와중에도 네 머릿속은 브런치 글의 방향을 고민하느라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엄마에게 관심 많은 작은 아들이 지나가며 물었지. 엄마 뭐해? 또 스도쿠 해? 아들의 눈에 비친 너는, 시도 때도 없이 휴대폰 게임이 묻혀 사는 느긋한 중년 여성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머릿속에서 '나부터 나부터'라고 서로 손을 들고 보채는 문제들을 잠시 잠재우기 위한 행동임은 모르겠지. 


하지만 스도쿠 한판을 온전히 집중해서 풀기가 얼마나 힘들던가.

다음 주는 오전 월화목금, 오후 화수목 일정이 있고 이번 주에는 화, 목, 금에 있군. 목요일 강의 준비는 수요일 오후에 시작하고 금요일에 학생들에게 나눠줄 읽기 자료는 목요일 오후에 출력해야겠다. 아! 목요일 저녁에는 둘째 학교에서 모의면접 컨설팅을 해준다고 했으니 수요일에는 자소서를 같이 보며 예상 질문이라도 뽑아봐야겠어. 다음 주 화요일에 A대 1차 합격자 발표가 있고 토요일에 바로 면접이 있지. 따로 학원은 가지 않기로 했으니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제시문 면접 기출문제라도 뽑아 풀어보게 해야겠다. 영상으로 찍어 모니터링하는 과정도 해봤으면 좋겠지만, 싫다고 했으니 쩝. 그건 더 이상 강요하지 말아야겠다. 토요일 면접이 있으니 오후에 있는 아이들 수업도 휴강해야겠군. 중간고사 때문에 2주나 쉬었는데 한 주 또 쉬게 됐구나. 그나저나 다음 주부터 마의 스케줄이 6주 동안 이어지니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요일별 가야 하는 학교도 다르고 학교, 반마다 주제도 다르니 신경 쓰지 않으면 분명 어디서 구멍이 생길 수 있어. PPT는 다 준비됐고 수업 준비물도 우리 팀과 다 나눠가졌고, 각자 스케줄도 다 확인은 했지만 전날 더 확실히 챙겨야겠다. 아? 빨래가 다 됐네? 빨래 널고 나서 저녁 쌀을 씻어 놓고 냉동실에서 저녁에 볶을 오징어를 미리 꺼내놔야겠네. 냉장고에 식자재 현황이 어떻게 되지? 파가 떨어져 가는데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 볼까? 맞다. 휴지도 떨어져 가지. 오? 국거리 고기가 세일을 하네? 이것도 싸졌네?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놓자. 내일 새벽에 받으려면 밤 12시 전에 결제하면 되니 이따가 다시 들어와서 뺄 거 빼고 더 필요한 거 넣어야겠다. 그나저나 내일 아침 식사는 뭘 준비하지? 누룽지 끓이고 낙지젓갈, 계란말이를 해줘야겠다. 내일 남편이 양복 입는다고 다림질해놓으라고 했는데, 그건 저녁 먹고 치운다음 해야겠다. 맞다! 큰아들이 직구한 운동화 부대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까먹었네. 아! 내일 나가는 길에 우체국 들러서 보내고 가야겠다. 우체국 홈페이지에 가서 미리 신청해놓아야겠다. 4시 44분이다. 어쩐지 졸리더라니. 잠깐 눈 좀 붙여야겠다. 다섯 시까지만 자고 일어나서 할 일 해야지. 아... 정말 어디에 CCTV가 달렸나? 이 사람은 꼭 단잠에 빠질만하면 꼭 전화를 한단 말이야. 에이. 내 팔자야. 잠은 무슨 잠. 그냥 일어나서 하려던 일이나 하자. 풀던 스도쿠는 마저 풀고 일어날까? 아 이 문제는 왜 이리 어려워. 문자가 왔네? OO선생님이 파일을 보내달라고 하는군. 어휴... 그만 일어나자... 


잠깐 누워있는 동안에도 네 머릿속은 정신없이 돌아가더라. '바쁘다 바빠'를 외치며 맥락 없이 바빠 보이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속 흰 토끼 같지. 간밤에 꾼 흉흉했던 꿈이 그런 압박감 때문이었을까. 폭력적인 남자가 나타나 주변 사람들을 미친 듯이 때리고 너를 겁박하는 꿈 때문에 자다가 부정맥이 오기는 처음이었지. 자는 동안에도 너의 뇌는 바쁘다 바빠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걸까. 


하지만 유정아. 

모든 걱정, 할 일 잠시 내려놓고 심호흡 좀 하라는 말은 하지 않으련다. 타고난 기질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데,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통하기나 할까 싶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지진이 날 것 같은 머릿속과 그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살아가렴. 이따금씩 소파에 널브러져 스도쿠를 즐기고 '피식대학'이나 '숏박스', '빵송국' 같은 개그 채널을 보며 머릿속 교통정리를 하려무나. 그렇게 가만히 바쁘게, 느긋하지만 정신없게, 행복하지만 힘들게 계속 살아가려무나. 모두에게 삶이란 그러하거니와, 그래야만 삶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모처럼 맑은 가을 하늘이다.

너의 영원한 벗, 늘봄유정으로부터. 


추신 : 빨래 다 됐다고 벨 울린다. 



* 매거진의 이전 글, 김장훈 작가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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