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차시에 걸쳐 '자신의 의견 말하기'와 '친구의 의견 들어주기'를 경험한 아이들은 "선생님~ 다음 시간엔 토론하면 안 돼요? 토론하고 싶어요~"라고 노래를 불렀다. 어떤 주제로 토론하고 싶냐고 물으니 "고양이를 키울까, 강아지를 키울까요~", "민초 vs 반민초요~", "학교를 꼭 와야 되나요~" 등 각양각색의 주제들이 손을 들고 아우성이었다. 원래 교육프로그램 계획상으로는 마지막인 4차시에 토론을 할 계획이었지만 간절히 원하는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어 3차시 토론을 준비했다.
3가지 주제를 준비했다. 초등학교 1, 2학년을 대상으로 적절한 주제를 찾기가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지만, 나는 안다. 어떤 주제를 제시해도 아이들은 자신들의 수준에서 잘 풀어낸다는 것을.
< 동물원은 필요하다. >
< 친구의 잘못을 선생님께 말씀드려도 된다. >
< 급식을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한다. >
찬성과 반대로 나누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생소하고 헷갈릴 수 있어서, 양측의 입장을 문장으로 제시했다.
동물원은 필요하다 vs. 동물원은 필요하지 않다. 친구의 잘못을 선생님께 말씀드려도 된다. vs. 친구의 잘못을 선생님께 말씀드리면 안 된다. 급식을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한다. vs. 급식을 남겨도 된다.
주제가 적힌 종이를 보드에 붙이고 즉석에서 투표를 했다. 학생들에게 하트 스티커 2개씩을 나눠주고 원하는 주제에 붙이도록 했다. 한 군데에 두 개를 붙여도 상관없다고 알려주었다. 그렇게 결정된 주제는 1교시 '급식', 2교시 '동물원'이었다. 자료를 읽을 시간도 없을뿐더러 자신의 의견을 쓰고 발표하는 수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해 '주장하는 글쓰기'를 했다. '쓴 것을 발표하고 상대팀에게 받은 질문에 답변하기'까지만 진행하기에도 40분은 빠듯했다.
사각사각 연필 소리 사이로 "아... 난 찬성하기 싫은데... 반대로 옮기면 안 돼요?"라고 고집을 부리는 아이.
딸각딸각 의자 소리 사이로 "아... 빨리 토론하고 싶다. 전 벌써 다 썼어요!"라며 기대에 찬 목소리를 내는 아이.
짧은 머리를 잡아당기며 종이만 쳐다보는 아이.
다 썼는데 한 번 봐달라며 수줍게 종이를 내미는 아이.
아이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이 시간이 참 행복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앞다투어 발표를 했고 상대방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몇몇 아이 덕분에 수업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나름 열띤 토론을 마친 토론자들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가방을 챙겨 교실을 빠져나갔다. 아이들이 던져놓고 간 활동지를 챙기는 내 앞으로 1학년 남자아이 한 명이 다가왔다.
"안녕~~ 다음 주에 또 만나자~"라고 인사를 건네는 순간,
와락!
그랬다. 그런 게 진짜 와락 이었다.
키가 내 허리춤밖에 안 되는 그 작은 아이는 양팔을 잔뜩 벌려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선생님~ 정말 너무 고마워요. 토론하게 해 줘서. 토론이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어요."
이런 당황스러움이라면 얼마든 끌어안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심장의 요동은 얼마든지 몰아쳐 와도 좋았다.
"어머... 너무 고마워~"
그 아이는 짐을 챙겨 복도로 나간 나를 저 멀리서 뛰어와 다시 한번 안아주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돌봄 교실 선생님 앞에서 난 얼마간의 우쭐함을 느끼고 당당하게 돌아 나왔다.
'마! 내가 마! 디베이트 코치 송유정이다. 토론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해주는 사람이란 말이다!'라며 마음이 한껏 들떴다. 내 봉사를 정당화하고 '보람차다'라는 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하기에 제격인 일화 하나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늦은 밤, 아이들이 버리고 간 활동지를 하나하나 다시 들여다보며 낮에 느꼈던 희열을 다시 한번 누리려는 찰나. 한 아이의 활동지에서 나는 다시 한번 심장이 벌렁거렸다.
"햄 노잼. 바보 똥개 10000000000000 X 1000000000000000000"
거기에 더해 정성스레 그린 야유의 손가락 표시가 4개 더 있었다.
그랬다. 열렬한 팬의 환호성 때문에 잠시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있었으니 '모두에게 맞는, 모두가 좋아하는 교육 방식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아이에게는 자신의 의견을 남들 앞에서 발표하고 질문과 답변이 격렬하게 오가는 토론의 현장이 가슴을 뛰는 일이겠지만, 어떤 아이에게는 세상 재미없고 때로는 공포스럽기까지 한 '핵! 노! 잼!'일 수 있다. 그러니 그런 토론을 신나게 가르치러 온 나는, 토론 시간이 힘들고 싫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나란 선생은 '바보 똥개 x 1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일 수밖에.
그런데 그 글씨마저도 어찌나 웃기던지.
열심히 쓰길래 모두 글을 쓰는 줄 알았는데, 그 시간에 이런 정성스러운 그림을 그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을 그 아이를 생각하니 웃음이 터졌다. 그러면서 각오를 다지게 됐다.
'기다려라. 아이야. 마지막 만남인 다음 주에는 반드시 토론의 재미를 알려주마. 가만있어 보자... 이름이 뭐였더라?'
교육자원봉사의 맛은 이거다. 실은 모든 수업의 맛이 그렇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대로 인생에는 단맛, 쓴맛 다 있으니 꿀맛에 취하지 말고 쓴 물 삼켰다고 투덜대지 말라는 가르침을 매번 내게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