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초 돌봄교실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8월 말이었다. 9월 초부터 예정된 돌봄교실 교육자원봉사 확인차 연락하셨다고 했다. 교육자원봉사 확인 전화는 주로 일주일 전에 내가 먼저 하는데, 이번에는 하지 못했다. 봉사가 있는 줄 몰랐으니까...
"네? 교육자원봉사요? OO초에서요? 돌봄교실요? 저랑 통화해서 일정 잡으셨었나요?"
나의 당황은 선생님의 황당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지난 3월에 통화로 9월 일정을 모두 잡지 않았냐는 선생님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바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교육자원봉사 일정표, 휴대폰 달력, 다이어리 어디에도 남겨진 메모는 없었지만 이럴 땐 나를 의심하는 게 더 안심된다.
올해 초부터 학교 선생님들과 일정을 잡을 때 통화를 녹취해 왔다. 통화하며 메모를 해놓기는 하지만 일정, 토론주제, 특이사항 등을 놓치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통화녹음 목록을 뒤져보니 3월 말 3분간 통화한 내역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친절하게 9월에 해드리겠노라 약속을 잡는 내 목소리가 담겨있었다.
수업이 있는 걸 까맣게 잊고 있다가 학교 전화를 받고 달려 나가는 꿈, 갔는데 USB며 포인터며 아무것도 안 들고 간 꿈을 여러 번 꾸곤 했는데, 하마터면 현실이 될 뻔했다. 돌봄교실 교육자원봉사 3일 중에는 교육청에서 하는 업무가 하루 걸려있었지만 돌봄교실 교육자원봉사가 선약이었으니 다른 분께 부탁을 했다. 반나절 업무치고는 괜찮은 수당이지만, 당연히 포기했다. 돈 벌러 가는 대신 교육자원봉사를 가게 된 것은 아쉽지 않으나 꼼꼼히 챙긴다고 챙겼는데 구멍이 생긴 것이 내내 못마땅했다.
작년에 갔던 돌봄교실에서 1학년 학생 한 명이 내게 말했던 단어가 떠올랐다.봉사라는 말을 잘 몰랐던 아이가 내게 '행사'오신 분이냐고 물었던 것. 그 말에 자극받은 나는 행사 온 사람처럼 흥겹게 수업했고 아이들도 초등 1, 2학년답지 않게 거뜬히 토론을 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양 뺨을 힘껏 두드렸다.
"2학기다! 정신 차려라! 떨어졌던 텐션을 끌어올려야지!! 봉사, 아니 행사 다시 뛰어야지!!!"
약속한 날이 되어 학교로 갔다.
작년에 갔던 학교와 달리 이곳은 아이들이 좌탁에 앉아 수업을 하는 교실이었다. 신발을 벗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는 아이들. 낯설었지만 뭐, 별일 있겠나 싶었다. 작년에 반응이 좋았던 포토스탠딩을 야심 차게 꺼냈다. 기발하고 통통 튀는 문장이 많이 나왔던 기억이 나면서 이곳 아이들은 또 어떤 재미를 줄까 기대를 했다.
나의 안일한 마음과 서툰 기대는 1분도 안 돼 처참히 무너졌다.
좌탁 앞에서 아이들은 아주 편하게 반쯤 누워있었다.
열 명중 두어 명은 한글을 몰랐다.
나누어준 사진 중에 한 장을 고르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쓰라는 나의 설명을 아이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한글을 모르거나, 뭘 써야 하는지 몰랐으니 제대로 쓴 아이가 없었다. 제대로 쓰지 않았으니 발표도 안 하겠다고 했다. 흥미가 떨어진 아이들은 점점 더 드러누웠다.
그런 와중에 한 아이가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슬며시 오른손을 엉덩이 쪽으로 가져가더니 바지 속으로 슬며시 넣었다. 잠시 꼼지락거리다가 손을 빼더니 이번에는 그 손을 코앞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손을 똥꼬와 만나게 했다. 다시 코, 다시 똥꼬, 다시 코, 다시 똥꼬, 다시 코. 네 번을 그리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나서 나눠준 사진을 이리저리 조물조물 만졌다.
'아... 사진에... 그... 어쩌면... 냄새가... 아... 저 사진들 다시 회수해야 하는데...'
초등학교 40분 수업이 늘 야속했었다. 디베이트를 하기에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늘 말했었다.
"벌써 끝났어요?"
그런데 디베이트 강사 7년 경력에 이렇게 끝이 안 보이는 40분은 처음이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악몽, 깬 줄 알았는데 여전히 꿈속임을 알게 되는 꿈같았다.
잘 됐던 수업만 생각하고 더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은 죄.
방학 동안 떨어졌던 텐션을 올리지 않고 2학기에 임한 죄.
초등 고학년과 중,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맞춰져 있던 주파수를 초1, 2 영역으로 옮겨놓지 않은 죄.
아가들이라고 우습게 보고 긴장하지 않은 죄.
이 모든 죄에 대한 벌은 악몽 같은 현실이었다.
다음 주에 있을 두 번째 수업을 위해 고민 중이다.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있으니 쓰기보다는 말하기 위주로 수업을 짜야겠다. 어떻게 하면 놀이 같은 토론의 경험을 선물해 줄까. 누워있는 아이들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 뭘까. 똥꼬냄새 맡으며 멍 때릴 여유조차 주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