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오지 않았다.
난생처음 가는 수업도 아닌데 이렇게 걱정될 게 뭐람. 다음 달에 있는 대학생 대상 특강도 걱정되지 않는데 초등학교 1, 2학년 꼬맹이들이 나를 벌벌 떨게 할 줄이야.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 아니 1학년이다.
한글을 모르거나 방바닥에 누워있거나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정신없는 아이들을 일으켜 세워 수업에 참여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인들에게 물으니 주제에 맞게 그림으로 표현하게 하고 발표시키라는 조언이 다수였다. 돌봄 교실 토론 강의 계획서에 써넣은 '자신의 생각 말하기' '친구의 이야기 잘 듣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심, 그림을 그리게 하는 건 영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다른 수업에서 많이 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고 40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그림만 그리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토론수업이라는 타이틀로 만나는 것이니 맛은 보여주고 싶었다.
일단 주제를 정해야 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고 이야깃거리가 많은 주제. 너무 심각하거나 심오하지 않고 흥분해서 싸움이 일어날 일은 없는 주제. 고민 끝에 '동물원은 필요하다 vs. 필요하지 않다'로 정했다. 글을 쓰고 발표하는 건 지난 시간에 실패했으니 읽고 생각하고 가볍게 이야기 나누는 방법을 고민했다. 찬반의 주장을 적은 논거카드와 카드를 놓을 4절지 보드를 준비했다. 시간이 남아돌면 큰일이니 플랜 B로 신호등 카드를 준비했으며 또 혹시 몰라 주장을 적어볼 활동지도 준비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학교에 들어섰다.
* 동물원에 가본 적 있나요?
* 어떤 동물이 기억에 남나요?
* 그날 기분이 어땠나요?
"동물원에 가본 적 없어요~"
의외로 가본 적 없다는 아이들이 많았다. 코로나로 몇 년간의 공백이 있었던 탓일 게다.
"한 살 때 처음 갔을 때 기억이 나요~ 4살 때까지 가고 그다음부터는 못 가봤어요~"
한 살 때의 기억이 분명히 난다는 아이. 돌고래가 공연하는 것도 봤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처음 보는 동물들이 많아서 신기했어요."
* 푸바오를 아나요?
* 푸바오가 내년에 왜 중국으로 돌아가는지도 알고 있나요?
푸바오 이야기에 아이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이번에 동생이 생겼대요~"
"아이바오 새끼가 둘이 된 거네?"
"동생은 쌍둥이야~"
"그러니까 둘이잖아."
"푸바오까지 셋이라고!!"
한 명씩만 말하고 친구가 말할 때는 잘 들어주자고 몇 번을 말해야 했다. 멸종위기종인 판다를 여러 나라가 서로 도와가며 보호하는 중이고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중국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줬다. 이럴 때가 힘들었다.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고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하는 것. 예를 들어 '멸종위기종'은 '세상에서 없어질지도 모르는'으로, '성 성숙 시기가 오기 전에'는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으로, 반환은 '다시 돌려보내는 것'으로.
* 동물원에 구경을 갔을 때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고 했는데, 만일 여러분이 동물원에 있는 동물이라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나요?
"사람들이 모두 나만 바라보고 이뻐해 주고 귀엽다고 해줄 거니까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전 누가 머리 만지는 거 싫어하는데, 이쁘다고 쓰다듬어주면 너무 싫을 것 같아요."
"유리창을 두드리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 날 것 같아요."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밤에 혼자 남아 있으면 너무 무섭고 슬플 것 같아요."
* 특별히 되고 싶은 동물이 있나요?
"전 아마존 자이언트 수달이 되고 싶은데요, 그 이유는... 걔가 워낙 똥을 많이 싸는데 도대체 뭘 먹길래 그렇게 똥을 많이 싸는지 궁금해요."
'똥'얘기에 빵 터진 아이들은 한동안 수습되지 않았다.
* 동물원은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그렇게 말하는 걸까요?
"뭐라고요? 왜요?"
"동물원은 아주 싹 다 문을 닫아버려야 돼요. 사람들이 동물원에 데리고 가려고 잡다가 동물들이 얼마나 많이 다친다고요."
이미 아이들은 동물원 안으로 성큼 들어와 있었다.
아이들에게 논거카드 세 장씩을 나눠주었다. 동물원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카드인지 '필요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카드인지를 잘 생각해 보고 알맞은 곳에 놓아달라고 했다. 카드를 모두 분류해 놓아 본 뒤 신호등 카드를 나눠주었다. 이야기를 나눠본 지금, 마음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발표해 달라고 했다. 지난주에 그 쑥스러워하던 아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적극 발표했다.
"사람들이 자기 좋자고 동물들을 가둬놓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동물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에 없는 동물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은 동물원밖에 없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동물을 직접 보는 게 좋으니까 필요한 것 같긴 한데 동물들이 좀 불쌍하니까 필요 없는 것 같기도 해요. 전 아직 생각 중이에요."
지난주 잔뜩 겁먹었던 나와 천방지축이었던 아이들과의 틈이 조금은 좁혀졌다.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자신의 냄새를 자꾸 내게 맡게 하려는 모습으로 알 수 있었다. 동물들이 서로를 탐색할 때 그러듯이 말이다. 바닥에 앉아서 수업을 듣는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무릎을 꿇고 수업을 했더니 다양한 냄새가 코끝에 전해졌다.
왼손을 깁스로 감싼 아이에게서는 깁스 안의 꼬랑내가.
다리에 앉았던 딱지를 떼어내 버려 피가 줄줄 흐르는 아이에게서는 비릿한 피냄새가.
발을 치켜들고 내 얼굴에 가져다 대는 아이 발의 꼬랑내가.
"선생님~ 제 발꼬락 냄새 맡아보실래요? 헤헤헤"
"선생님~ 여기서 피가 줄줄 나요. 이거 봐요. 어떻게 해요?"
아이들의 꼬순 내를 맡다 보니 80분이 금세 지나가버렸다.
아이들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물과 똥에 대해 얘기 나누며 서로의 발꼬락 냄새까지 나누는,
나는 돌봄교실 교자봉이다.
집에 왔는데도 발꼬락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냄새는 내 것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