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전날부터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가며 할 일인가 싶었다. 이번 돌봄 봉사가 끝나면 교육청의 돌봄 업무 담당자에게 거절 의사표현을 확실히 해야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다. 하지만 당장 다음날로 예정된 수업은 어찌 됐든 준비해야 했다. 쓰는 것이 서툰 아이들이지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발표하는 연습을 해보는 수업. 40분이 아이들의 이야기로 꽉 차는 수업. 그렇게 탄생했다.
'OO이의 하루'
학교 명칭을 가상 어린이의 이름으로 바꾸어 OO이의 하루를 따라가는 것으로 수업을 구성했다. 아침에 일어나 잠들기까지 1, 2학년 어린이가 겪을만한 여러 가지 갈등 상황을 소개하고 그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그 선택의 이유는 무엇인지를 설명하기로 했다. 의사표현의 부담을 덜기 위해 찬성과 반대가 쓰여있는 푯말을 활용했다. 발표는 강제가 아니었다. 하고 싶은 사람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서로 이야기하고 싶어 해서 발언 순서를 정해주어야 했다.
아침에 일어난 OO 이에게 엄마가 말했어요.
"OO아~ 얼른 일어나서 밥 먹어라~ 밥 먹고 세수하고 양치하고 학교 가야지~"
OO 이는 아침밥을 먹기가 싫었어요. 그런데 엄마는 무조건 조금이라도 먹고 가야 한대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아침밥을 꼭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아침은 꼭 먹어야 해요. 점심시간까지 있다 보면 힘도 없어지고 배도 고파지거든요."
"그런데,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으면 하루종일 속이 안 좋아서 안 먹고 싶을 땐 안 먹는 게 좋은 것 같아요."
OO이가 교실에 들어서는데 저~기서 친구가 불러요. 그런데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라 OO이의 별명을 부르네요? OO 이는 아침부터 기분이 나빠졌어요. 친구의 이름 대신 별명을 부르는 건 꼭 안 좋은 걸까요?
"당연히 안 좋죠. 이름 놔두고 왜 별명을 불러요. 안됩니다!!"
"그런데 저는 제 별명이 마음에 들어서 불러도 좋은 거 같아요. 제 별명을 미술선생님이거든요~"
"저도요! 제 별명은 뿌꾸뿌꾸인데 제가 귀엽다고 그렇게 불러주는 거라서 기분 좋아요."
그만하라고 하는데도 친구가 자꾸 별명을 불러 기분이 나빠진 OO 이는 선생님에게 가서 친구의 행동을 일렀어요. 그랬더니 친구가 화가 났네요? 여러분도 이런 경험 있죠? 어떤가요? 친구의 잘못된 행동을 선생님께 일러도 될까요?
"몇 번 얘기했는데도 친구가 안 고쳐지면 선생님에게 말해야 해요. 그래야 또 그런 행동을 안 하지요."
"맞아요. 그런데 세 번 정도는 기회를 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한 번만에 바로 이르는 건 좀..."
쉬는 시간이 됐어요. 그런데 어떤 친구가 스마트폰을 켜고 게임을 하고 있네요?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스마트폰을 많이 사용하고 있지요. 스마트폰은 키즈폰이랑은 달라요. 컴퓨터로 할 수 있는 기능이 모두 들어있는 전화기를 말해요. 초등학생에게 스마트폰이 꼭 필요할까요?
"엄마에게 내가 어디 있는지를 알려줘야 할 일이 많으니까 전화기는 필요한데, 그게 꼭 스마트폰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맞아요! 스마트폰을 많이 하면 눈도 나빠지고 거북목도 된댔어요."
자, 이제 OO 이는 급식을 먹으러 갔어요. 오늘은 OO이가 좋아하는 반찬이 많이 나와서 밥을 남기지 않고 잘 먹었어요. 그런데 친구들 중에는 밥을 남기는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잔반통이 또 가득 찼어요. 학교에서 먹는 급식, 남겨도 될까요?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도 다르고 알레르기 때문에 못 먹는 음식도 있으니까 남겨도 돼요."
"영양사 선생님이 열심히 만들어준 거니까 안 남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남은 음식이 땅으로 들어가면 안 좋을 거 같아요."
"옛날에 제가요, 급식을 먹으러 갔는데요, 갑자기 토가 나오려고 했던 적이 있어요."
"이건 주제랑은 상관없는 얘긴데요, 저 이번주 토요일에 동물원에 가요."
돌봄 교실에 있던 OO 이는 이제 학원에 가요. 여러분도 학원에 다니나요? 어떤 학원에 가나요? 초등학생에게 학원은 꼭 필요할까요?
"전 태권도랑 미술학원만 다녀요. 태권도는 우리 몸을 튼튼하게 해 주고 미술학원은 그림을 잘 그릴 수 있게 해 주니까 필요한 거 같아요."
"아휴... 전 영어랑 태권도랑 미술이랑 또... 이름이 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한 개 더 다녀요. 어떨 때는 7시에 집에 갈 때도 있어서 힘들어요. 아이들이 힘드니까 학원은 안 다니게 했으면 좋겠어요."
학원까지 다녀온 OO 이는 씻고 저녁을 먹고 이도 닦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누웠어요. 그런데 아차차... 학교 숙제를 안 한 게 생각났어요. 귀찮지만 다시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하네요. 여러분도 학교 숙제가 많나요? 주로 어떤 숙제가 있어요? 숙제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주로 수학익힘책 숙제가 있어요. 너~~ 무 싫어요. 숙제는 무조건 싫어요."
"집에서도 열심히 공부하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숙제는 싫어요.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숙제는 꼭 필요하진 않은 것 같아요."
"이건 상관없는 말인데요, 저 수학문제 잘 풀어요."
아이들과 OO이의 하루를 쫓다 보니 40분이 훌쩍 지나갔다. 마무리멘트로 3주간의 수업을 정리했다.
"저는 토론을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토론이라는 어려운 말 대신 이것만 기억하세요. 나의 생각, 나의 주장을 이야기할 때는 이유를 들어서 말하기요. 부모님이나 선생님, 친구들에게 떼쓰지 않고 차분하게 이유를 들어 말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듣기만 하면 토론을 잘하는 사람이 될 거예요."
짐 챙겨 떠나는 나를 붙잡고 한 아이가 말했다.
"있잖아요. 저는요, 갖고 싶은 장난감이 있을 때 이유를 들어 얘기하거든요? 그런데 엄마아빠는 안 사주는 이유를 절대 말해주지 않아요!"
그랬다. 아이들은 훤히 꿰고 있었다. 자신은 하고 싶은 일,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이유가 많은데 어른들은 금지하는 이유를 대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대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정작 디베이트를 배워야 하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일 것이다. 상대와 나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자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 상대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제대로 전할 수 있는 기술,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해도 끈기 있고 진지하게 들어주는 태도.
나에게 돌봄 수업을 종용하는 교육지원청 업무담당자를 '불여쉬'라고 남몰래 불렀었다. 봉사를 강요하는 것 같은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온갖 아양, 애교를 떠는 것이 꼭 여우 같았다. 어느새 홀려 돌봄 교실 교육자원봉사를 가고 있다 보면 '또 당했다!!!'라며 자괴감이 들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돌봄 교육자원봉사를 시작할 때는 다시는 안 할 거라며, 이번이 진짜 마지막 돌봄 수업이라고 다짐했다. 한글 모르는 아이들, 누워서 수업 듣는 아이들과 고군분투하며 해결책을 모색하다 보니 3주가 훌쩍 지났다. 마지막 수업을 나름 흐뭇하게 마치고 나오며 '이걸 또 해낸' 나 자신이 대견했다. 성취감, 자신감, 만족감, 행복감... 그 무엇에 홀린 듯이 또 길을 나섰다.
여우에게 홀린 것인지 나에게 홀린 것인지,
아이들에게 홀린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나는 교자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