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값이던 오이가 세일을 하기에 얼른 10개를 주워 담은 것이 화근이었다. 김장 전 소박이를 담그면 며칠 김치 걱정 없이 가볍게 먹기 좋겠다고 생각했다. 뜨거운 소금물을 부어 잠시 절이는 동안 부추 속을 버무려놓으면 완성까지 한 시간이면 충분하니 부담스러운 일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사 계획대로 되던가. 벌려놓은 다른 일들을 마무리하고 보니 밤 12시가 다되었고 하는 수 없이 오이를 산채로 자르고 갈라 속을 욱여넣었다. 모처럼 삼삼하고 맛있게 됐다고 만족스러웠는데 오이소박이는 익는 것과 동시에 물러져버렸다. 녹아내리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먹자니 식감이 영 못마땅하고 버리자니 아깝고 미안해 아직도 냉장고에서 걷어내지 못했다. 30분만 내어 소금물에 절였더라면, 욕심부리며 오이를 사지 않았더라면, 후회를 해보지만 곧 형체도 없어질 것 같은 오이를 앞에 두고 하는 의미 없는 푸념이다.
자신이 즐겨보는 드라마를 친한 내가 꼭 보아주었으면 하던 사람이 있었다. 거의 매일 만나 운동하고 밥 먹고 차를 마시던 가까운 이였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같은 드라마를 보고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녀를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어 봤던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가 그녀도 본 드라마였기에 자연스레 얘기 나누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나 보다. 친하다면 서로가 좋아하는 드라마도 함께 봐줄 수 있어야 하고, 함께 운동도 시간 맞춰 가는 것이 예의이자 의무라고 생각했다. 서서히 나에겐 짐이자 부담이 되었다. 서서히 그녀도 이런 내가 맘에 안 들어지기 시작했는지 어느 날 내게,
"넌 꼭 내가 보는 드라마만 일부러 안 보는 것 같더라?"라고 농담인 듯 한마디 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안 들리던 것들이 들리고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남편, 아이, 시댁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으면 그녀는 나보다 더 심하게 그들 욕을 했다. 도와주고 나눠주던 것을 당연한 듯이 여겼고 내게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을 때 그녀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내쪽에서 먼저 금을 긋고, 벽을 세우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만나기로 약속하면 며칠 전부터 부담감이 밀려오고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를 고민했으며 만나고 나면 며칠 동안 속이 시끄러워지는 날 보면서 이제는 관계를 정리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녀도 나의 이런 변화를 감지했고 자연스럽게 동네 지인이라고 하기에도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크게 싸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불만을 얘기한 적도 없는 그런 애매하고 찝찝하게 멀어진 사이. 그래서 늘 다락방 한구석에 정리안 된 잡동사니 상자처럼 보관되어있는 사람이다. 버리지도 못하고 정리도 못한...
언젠가 관계를 회복해보고자 억지스러운 만남을 가져보기도 했다. 평소처럼 웃고 떠들었지만 헤어지면서 다시 확실해졌을 뿐이다.
'오늘 우린 서로 발버둥 한번 처 본거였구나...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거구나...'
"우리 이제 그만 헤어져!"라고 확실하게 점을 찍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와의 이별이 내내 찜찜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때 내가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갖고 그녀를 대했더라면, 섭섭한 속내를 시원하게 얘기하고 풀었더라면, 그녀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한 편이라도 일부러 봐줬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베란다에 말라 비틀어진 화초가 두어 개 보인다. 똑같이 물을 주었는데 쟤들은 왜 저 모양이냐 비난하다가 거둔다. 그들만의 목마름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내 탓이 크다. 죽은 화분을 두면 풍수에 안 좋다고 하니 어서 자르고 뽑아 버려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룬다. 하루 이틀 미룬다고 미안함이 덜해지는 것도 아닌데 냉장고에 둔 오이소박이나 죽어버린 화초, 연락 끊은 지인 모두를 후련하게 버리지 못한다.
아무에게도 나의 무성의가 만들어낸 처참한 결과물들을 들키지 않을만큼 깜깜하고 고요한 어느 밤에 몽땅 내버리고 돌아서면 후련해질까. 아니면 자꾸 뒤를 흘끔흘끔 쳐다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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