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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an 25. 2023

딸박스, 며느리박스

보글보글 1월 4주 '며느리, 사위, 사돈'

'맨박스'란 남성들에게 남성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적 굴레를 뜻합니다. '남성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은 남성을 가해자로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성별뿐 아니라 우리가 가진 많은 역할에는 암묵적 강요가 따릅니다. 딸, 며느리, 아내, 엄마에게도 '이래야 한다, 이랬으면 좋겠다'는 역할론이 존재합니다. 


딸은?

'살갑고 다정다감하고 애교가 많아야 한다'라는 기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라는 내내 "우리 집 딸들은 다른 집 딸들과 달리 참 무뚝뚝하다! 어쩜 살가운 맛이 없니?"라는 어머니의 말을 들을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던 것을 떠올리면, 말하는 어머니나 듣는 저나 딸 역할에 대해 똑같은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들만 둘 키운 제 경험상, 무뚝뚝한 아들에게도 똑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차마 입밖으로는 못 내뱉었지만, 어떤 집 아들은 엄마에게 참 살갑던데 우리 집 아들들은 과묵하기 그지없구나... 생각한 적이 더러 있지요. 

사람들은, 아들이든 딸이든 자식이든 윗사람이든 상대의 다정함에 대한 기대를 품고 사는 게 아닐까요? 나와 관계 맺은 모든 이들에게 '다정박스'를 강요하는 건 아닐지...


며느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시어머니가 A라고 말한다 해도 본 뜻이 B였다는 것을 알아채야 하며, 남들에게는 딸 같은 며느리처럼 보여도 며느리다운 며느리이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시집살이와는 거리가 먼 시댁이었습니다만 20여 년 동안 아무도 모르는 속앓이는 종종 있었습니다. 시어머님 말씀 중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고민했던 여러 날이 있었고, 살갑지 못한 성격에도 준비한 멘트를 용기 내어 꺼내든 날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머~ 어머니 파마 하셨어요? 역시 어머님은 전혀 그 연세로 안 보이세요~"같은. 

20여 년을 살아보니 시어머니 입장에서 며느리라는 존재도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저처럼 표현이 많지 않은 며느리는 말이지요.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최근에는 제 마음속에 도청장치라도 심어놓으셨는지 제 속마음을 알아채시는 일이 많습니다. 시어머니도 며느리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어지간히 고민하신 것 아닐까 싶습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모두,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관심법박스'를 강요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내는?

'요리, 살림 똑 부러지게 하고 자식도 잘 키우면서 자기 일까지 있는데 요부이기까지 한 아내'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몇 달 전 교육청 포럼에서 패널로 발표를 한 적이 있었는데, 유튜브 생중계로 그 모습을 지켜본 남편이 유난스럽게 좋아하더군요. "도대체 못하는 게 뭐야~?"라며 듣기 좋은 소리를 여러 번 해주었는데, 그 말이 제게는 "그렇지! 아내라면 응당 그래야지~"로 들렸습니다. 칭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삐딱한 저는, 아내란 유난히 잘 해내야 할 것이 많다는 '완벽박스'에 갇힌 게 분명합니다. 


엄마는?

'자식을 늘 응원하고 지지해주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극성스러워서는 안 되며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어디쯤에 늘 존재하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살짝, 아주 살짝인데도 오버스럽게 간섭, 참견하는 순간 미세하게 굳어지는 아들들의 표정을 보았을 때 혹은, 바빠서 자기들에게 관심 주지 못하는 엄마 주변을 서성이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건네는 아들들의 허전한 얼굴을 보았을 때... 엄마라는 역할이 얼마나 힘들게 느껴지던지요. '도대체 어쩌라는 말이냐, 어디쯤 서있으라는 말이냐' 며 투덜거리다가도 끼니때가 되면 앞치마를 두르는 사람. 엄마는, 엄마라고 불리는 순간 '자식박스'에 갇히나 봅니다.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가지고 있는 역할 수만큼의 박스를 갖고 사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OO박스라는 것은 스스로가 규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역할에 대한 사회적 기대, 강요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걸 따를지, 아니면 그 굴레를 부술지는 각자의 선택이겠죠. 

살갑고 다정한 딸이자, 시어머니 마음속에 들어앉은 며느리이자, 도대체 못하는 게 없는 아내이자, 자식들에게 딱 적당한 엄마가 되겠다는 '완벽박스'에 갇힐 것인지, 

어느 역할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지만 어쨌든 행복한 '나'가 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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