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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Jan 23. 2023

툴툴대는 딸, 살살대는 며느리

보글보글 1월 4주 '며느리, 사위, 사돈'

심심찮게 "딸 같은 며느리", "엄마 같은 시어머니"를 '꿈'꾸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가끔은 정말 딸 같고, 엄마 같은 고부 사이를 자랑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기도 하고, 주변 혹은 지인들의 삶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흔치 않은 일이라는 걸 우리는 암암리에 알고 있다. 어쩌면 어렵기 때문에 '꿈'을 꾸는 것이 아닐까?


옛정 위에 새로운 정을 쌓으며 글을 읽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앵글아, 너는 결혼해서 시어머니가 너를 어떤 지칭으로 불렀으면 좋겠니?"

"글쎄, 왜?"

"이제 갓 시집온 며느리를 이름으로 부를지, 새아가라 부를지 고민하는 글을 읽었거든."

"난, 새아가!"

"정말? 난 네가 이름으로 불렸으면 좋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름으로 부르면 너무 친숙하잖아. 어느 정도 격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구나... 이름은 격이 없어지나?"

"엄마도 날 이름으로 부르고, 시어머니도 이름으로 부르면 차이가 없잖아. 시어머니가 엄마는 아니니까..."

"그런데 새아가라 부르다가 아기가 태어나면 OO어멈이 되는 거거든. 그럼 이름이 없어지잖아."

"없어지는 건 아니지. 엄마가 불러줄 거잖아."

"그러네..."

"엄마, 내 생각은 시어머니와 아무리 친하게 지내도 '엄마'가 될 수는 없는 것 같아. 정확한 지칭으로 불려야 지켜야 할 선에서 서로 조심하게 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을 못했어. 난 요즘 아이들은 지칭으로 부르는 것보다 이름 부르는 걸 더 좋아할 것 같았거든."

"내가 좀 꼰대라서 그래. 친구들도 나한테 꼰대라 하더라고...ㅎㅎㅎ"


앵글이와 대화를 하면서 200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환상이 깨어졌다. MZ세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은 자유분방하고 할 말하며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전달하며 살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나 보다. 철없이 느껴졌던 딸아이가 어느새 자라 삶에 대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도 신기했다.


사촌동생이 결혼을 한다며 예비 제부를 데려왔었다.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가 마음에 쏙 들었다. 동생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고 있음이 그의 행동에 그대로 묻어 나왔다. 이런저런 대화 끝에 나는 미래를 꿈꾸는 두 사람에게


"결혼을 하게 되면 양가부모님께 '속말'과 '겉말'을 나누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예를 들어, 주말에 갑자기 호출을 하셨는데 피곤하고 가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이 핑계, 저 핑계로 없는 사실을 만든다던가, 가기 싫은데 꾹 참고 억지로 가지 말고, 오늘은 너무 피곤하고 쉬고 싶으니 다음번에 가도 되겠는지 여쭙는 것이 좋아. 당장은 서운하시더라도 몇 번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면 이해해 주시게 될 거야. 한두 번은 어렵지만 서로 맞춰가는 게 마음 없이 움직이다 상처받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좋아."


어쩌면 이것은 동생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으니 너는 그렇게 살아보렴.'에 가깝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시어머니식 언어'는 영혼을 메마르게 한다. '괜찮다'라고 말하고 '괜찮다고 했다고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니?'라고 영혼을 찌르면 영문 모를 메시지 때문에 관계가 깨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 역시 그런 '시어머니식 언어' 때문에 몸살을 앓고서 시어머니 자리에 서면 나도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는 거다. 왜 그럴까?


나를 낮추는 것이 겸손이라 잘못 배우고, 내가 싫어도 순종하는 것이 어른 섬김이라 배웠기 때문은 아닐까?


나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내보이고 평가받는 것이 겸손이고, 원하지 않을 때에는 예의를 갖춰 거절하는 것이 사람 간 도리라고 배웠다면 어땠을까?


엄마와 시어머니, 딸과 며느리가 같아질 수 있을까? 


'딸 같은 며느리'를 원하는 시어머니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딸은 절대 며느리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딸은,

며느리처럼 하고 싶은 말 꾹꾹 누르며 무조건적인 'yes'로 답하지 않고,

며느리처럼 현관에 들어서며 바로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다.

며느리처럼 곰살맞게 미소 지으며 음식시중을 들지 않고,

며느리처럼 몸이 아픈데도 오라 가라 할 때 무거운 몸을 이끌며 애써 방문하지 않는다.

며느리처럼 억울한 잔소리에도 묵묵히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며느리처럼 '당신 아들'만 감싸는 상황에도 침묵하지 않으며,

며느리처럼 아들집이 제집인양 당당히 들락거리는 시어머니를 참아주지 않는다.


'딸은 예쁜 도둑'이라는 말이 있다. 원론적으로 딸과 며느리는 '엄마'가 다르기 때문에 결코 같아질 수 없다. 시집간 딸은 친정집 냉장고를 털어가도, 며느리는 시댁 냉장고를 채우며, 시집간 딸은 결혼을 시켰어도 끊임없이 무언가가 필요하다 요구하지만, 며느리는 무엇이 필요하신지 묻는다. 역할이 다른데 '딸 같은 며느리'를 바라며 친밀감을 더하려는 생각이 모순이다.


온전히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가족이 되려면 서로 간 '존중'이 필요하다. 상대의 경계선 안으로 들어설 때에는 반드시 '들어가도 괜찮은지' 동의를 구해야 하며,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혹여 동의했더라도 사람마다 자기만의 '경계'가 존재하므로 불편하지 않은 선부터 서서히 다가가는 것이 좋은 관계 맺음에 꼭 필요한 과정이다. 그들의 '경계'를 함부로 넘는 것은 '침해'이며, 반복된 침해는 '폭력'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의 아기에게도 함부로 '우르르 깍꿍' 얼르지 못한다. 아기가 낯을 익히고, 상대가 안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한 후 내민 손만 잡아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깜짝 놀라 울어재끼는 아기의 울음에 당황하게 될 것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로 가족이 된 며느리도 새 가정에 적응할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세운 가정을 단단히 하기 위해 시가족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며느리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경계선을 서서히 풀어낼 시간을 기다려주자. 안전한 곳이라는 믿음이 생길 때까지...


며느리는 누군가의 딸이고, 아들의 아내이며, 독립된 가정의 주인이다. 아들이 가정을 이뤄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잘 살길 원한다면 며느리를 '딸보다 귀하게' 여겨야 옳다. 아들이 사랑하는 며느리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면 결국 제일 힘든 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아들'이 되기 때문이다.


※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사견이므로 혹 전문성이 부족하여 읽기에 불편하시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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