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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un 24. 2023

나이 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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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의 음주로 퀭해진 큰아들을 주방에서 마주쳤다. 눈도 뜨지 못하고 물만 벌컥벌컥 마시는 게 꼴보기 싫으면서도 빈 속에 뭘 좀 넣어줘야겠다는 애미마음이 발동했다.

"일어났어? 뭐 좀 먹을래? 고기 구워줄까?"

아침 고기도 늘 거뜬하던 녀석의 반응이 어째 영 시원찮았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누룽밥 끓여줄 수 있어?"

그 말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20대의 아들에게 나이 든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숙취로 쓰린 속에는 고기보다 누룽밥이 어울린다는 것을 아는 것.


..

3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함께 하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들과 부쩍 만남이 잦아진 것은 작년 말이었다. 친구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음에 달려간 장례식장에서 친구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

몸에 좋은 맛난 걸 함께 먹기 위해 만나고 친구의 수술이 잘 되기를 기원하며 만나고 항암이 끝나서 만났다. 그러면서 알았다.  친구들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온통 내 삶에 집중되어 있던 나는 그저 '30년 지기 친구'라는 타이틀만 쥐고 있었다는 것을. 친구들이 애정하는 성시경 콘서트를 따라다니고 비싼 맛집과 카페를 찾아다니면서 즐겁고 행복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친구들과 나누던 일상의 대화에 나는 귀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얼마 전 모임에서 우리는 비싼 밥을 먹는 대신 두부 요리 전문점에서 밥을 먹고 꽃꽂이 1 day class를 함께 했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꽃을 똑같은 오아시스에 꽂는 일인데도 우리가 내놓은 결과물은 모두 각양각색이었다. 서로 다른 우리에게 공통된 사실 하나는 모두 나이 들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오랜 친구들과 함께 나이 든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평생 성시경 이야기만 하면서 살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건강에 대해 이야기하고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

"당신 무슨 코를 그렇게 골아?"

먼저 일어난 남편이 좋은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 장난에 시동을 걸었다.

"그럴 리가. 내가 무슨 코를 골아?"

일단 우겨보는 나였다.

"그럴 줄 알고 녹음해 놨지."

남편이 들려준 녹음 파일에서 웬 여자가 신나게 리듬을 타며 코를 골고 있었다. 확실히, 쌔근쌔근은 아니었다.

"뭘 그렇다고 녹음까지 해놓냐?"

증거를 내놓지 않으면 일단 잡아뗄 나를 아는 남편은 두고두고 놀려댈 수 있는 증거를 확보했다.

이후로 조심하려고 애썼지만 그것만큼 허무맹랑한 다짐이 어디 있겠는가. 소파에 누워 잠깐 쪽잠을 자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허우적 대는 그 시간에는 나의 코골이가 노골적으로 내 귀에 꽂혔다. 그러면 괜히 민망해서 일어나자마자 옆에 있는 가족에게 묻는다.

"나 코 골았지?"


부부에게 나이 든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끊임없이 나 자신을 의심하는 것.

날로 심해지는 남편의 장난을 감당해야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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