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는 문장이 이것뿐이었다. 창문 밖에는 장마 시작을 알리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는데 생각나는 단어가 '늘 봄'이라니... 나는 인생 첫 싸인을 그렇게 시작했다.
모 교육지원청과 종합사회복지관 협력 사업으로 지역교육기부자 양성과정이 열렸는데, 그 포문을 열어달라는 강의 의뢰가 들어왔다. '제로웨이스트 공예활동가'로서 지역사회에서 교육기부를 하게 될 수강신청자들에게 교육자원봉사가 무엇이며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고 있는지를 알려달라는 주문이었다. 자원봉사라는 분야의 특성상, 내게 주어진 두 시간은 강의라기보다는 사례 나눔 내지 가치 공유의 성격이 강했다. 거기에 미래의 교육자원봉사자가 될 수강생들이 각오를 다지도록 마법 주문을 거는 일까지가 내 몫이었다.
열다섯 명의 수강자들은 쉬는 시간 없이 진행된 두 시간 동안 한 번의 흐트러짐 없이 경청해 주었다. 일반적인 자원봉사와는 달리 교육기부는 전문성을 갖추기 위한 준비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나의 말에 조금씩 벌어진 수강생들의 입은, 교안을 짜고 PPT 만드는 일에도 익숙해져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턱이라도 빠진 것처럼 축 늘어져버렸다. 수강생 대부분이 경력단절의 가정주부라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였는데 이것저것 할 것이 많다고 하니 지레 겁을 먹은 눈치였다.
"겁내지 마세요.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거잖아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일단 그냥 해보는 거예요. 안 해봤을 때는 엄두도 안 나고 겁이 나지만 일단 시작하고 나면 조금씩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실 걸요? 저와 함께 봉사하시는 선생님들도 그랬어요. 처음에는 제가 만든 디베이트 주제, 교안, PPT에만 의존하셨는데 계속 수업을 해보고 몇 번 파일을 날리고 하다 보니 이제는 각자 만들어서 공유하는 수준까지 되었어요. 디베이트든 봉사든 먼저 시작했던 제가 이제는 그분들 덕에 더 양질의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말도 있잖아요.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 누구나 무엇이든 얼마든 할 수 있어요."
수강생들은 그제야 웃었다.
관에서 주도하는 무료 강의의 가장 큰 난점은, 수료를 하고 활동을 하는 시점에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소위 '먹튀'가 많다는 것이다. 활동을 강제할 수 없으며 각자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지만 결론은 먹튀다. 4년 전 용인에서 디베이트 교육자원봉사자 양성과정을 했을 때도 그랬다. 24명이 신청을 했지만 과정이 종료될 때 남은 인원은 14명이었으며 그중 봉사를 하겠다고 남은 이는 아홉 명, 아직까지 나와 함께하는 분은 다섯 명이다. 그래서 이런 양성과정 수강생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면면이 관찰하게 된다. 계속 남을 관상인지, 이미 마음이 떠난 얼굴인지...
제로웨이스트 공예활동가 양성과정에는 환경을 위해 소소한 실천을 하던 각자의 삶을 지역사회와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수강을 하게 된 분들이 많았다. 그러니 임하는 마음가짐들이 여느 프로그램과는 다를 것이다. 그 마음이 변치 않도록 꿈과 희망 내지는 그 길을 계속 갈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부여해야 했다.
"교육자원봉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들께 조금 고무적인 이야기를 해드린다면, 경험과 내공이 쌓이다 보면 서서히 강의의뢰도 들어온다는 거예요. 봉사로 시작한 일이 소득과도 연결된다는 것이죠. 또 한 가지 제가 봉사를 계속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는데요, 봉사를 하면 할수록 제 삶의 운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오타니 쇼헤이'라는 유명한 일본 야구선수가 있는데 그분은 고등학교 1학년때 8 구단 드래프트 1순위에 들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하위목표 8가지와 세부목표 8가지를 기록한 만다라트라는 걸 작성한 것으로 유명해요. 그중에 제가 주목한 부분은 '운'인데요. 운을 높이기 위해 그는 야구부실 청소를 하거나 인사하기, 심판을 대하는 태도, 긍정 마인드등 일상의 사소한 부분까지 계획을 했어요.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운이라는 것도 통제 가능하다고 믿은 거죠. 저도 그렇게 믿어요. 교육자원봉사를 하면서 웃는 얼굴,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넬 때마다 제 운이 좋아진다고 믿어요. 실제로 저는 교육자원봉사를 시작하고 나서 모든 것이 좋아졌어요. 가족과의 관계도 좋아졌고 저와 가족들 모두에게 좋은 일이 계속 생기고요. 그러니 여러분. 끝까지 해보세요. 나누면 나눌수록 좋은 일이 생기는 경험을 여러분도 해보시길 바랍니다."
나는 꽤 이기적인 마음으로 봉사를 한다. 내가 나누는 만큼 나에게 더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 말이다. 순수하면서도 거창한 이유들을 댈 수도 있겠지만, 봉사를 하면 할수록 내 운이 좋아진다는 것만큼 나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마땅한 이유는 없다. 속물 같지만 솔직한 이 마음을 두 시간 동안 나누었다.
강의가 끝난 후 모두가 짐을 챙겨 자리를 뜨고 있는 와중, 상기된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난 수강생 두 분이 수줍게 요청하셨다. 사인을 해달라고.
"싸인요? 저요? 왜요?"
당황한 나였다. 말 그대로 왜요? 였다. 스타 강사도 아니고 유명인도 아닌, 그저 어느 교육지원청 교육자원봉사자인 내게 싸인이라니... 그럼에도 수줍게 내민 손이 부끄럽지 않게 최대한 정성껏 사인을 해드렸다.
"늘 봄 같은 날 되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싸인에 이어 손도 잡아보자, 사진도 찍자 하며 과분한 응원을 전해주셨다. 내 마음은 전에 느껴본 적 없는 간질거림과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내가 뭐라고,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저렇게 과분한 관심과 애정을 주실까. 참 감사하긴 한데 이렇게 취해 있어도 되나. 이 또한 지나가겠거니 생각하며 경망스러워지는 마음을 꾸준히 경계해야 하는데... 싶었다. 하지만 이 역시 내가 쌓아 올린 운이겠거니 받아들이고 일단은 만끽하기로 했다.
교육자원봉사를 시작한 이후로 내 마음은 늘 봄이다. 봉사를 할 때마다 복리로 적립되는 운을 야금야금 꺼내 늘 봄 같은 날을 만끽한다. 부끄럽게도 돈을 모으고 적립하는 법은 잘 모른다. 다행히도 운을 모으고 적립하는 법은 잘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