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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ul 12. 2023

빤스를 가려버린 고정관념

출근 준비를 하던 남편이 먼저 외출한 내게 전화를 했다.

"왜 내 빤스만 없어?"


궂은 날씨 때문에 빨래가 더디 마르다 보니 속옷 서랍장이 비어있던 것. 남편은 새 속옷을 꺼내 해결하고 빨래 상태를 보기 위해 베란다로 나갔다. 그런데 웬걸? 빨래 건조대에는 아들들의 속옷뿐이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자기 빤스는 보이지 않았다. 화가 났다.

'어차피 빨래하는 길에 같이 빨면 될 것을 왜 내 것만 쏙 빼고 빤단 말인가. 아내의 그 속내는 뭐란 말인가. 아들들이 배고프다고 하면 지극정성으로 고기를 구워주면서 내가 배고프다고 하면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주방에 들어갈 때부터 알아봤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한 마디 하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에게 바로 전화를 한 것이다.


처음엔 그런 남편이 귀여웠다. 베란다를 잘 둘러보면 당신 빤스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억울하다는 쪽은 남편이었다.

"다 찾아봤지. 다 찾아봤는데도 내 빤스만 없으니까 전화한 거잖아. 빠는 김에 같이 빨면 되는데 왜 내 빤스만 쏙 빼고 안 빨았냐고. 아들들 빤스는 저렇게 쭉 널어놨는데 말이야."

일단은 어르고 달랬다. 왜 형들만 사탕 사주고 나는 안 사줬냐며 길바닥에 철퍼덕 앉아 발을 굴러가며 우는 막내 다루듯...

"여보. 우리 집에서 빨래하는 사람은 나뿐이잖아. 내가 빨고 널었다는데 왜 우겨. 베란다 들어가자마자 좌측을 봐. 좀 낮은 건조대에 당신 빤스만 따로 쭉 걸어놨잖아."

"봤어. 다 봤다고. 어디에도 없다니까?"

"시선을 조금 낮춰서 낮은 건조대를 보라고."

"없다고! 없다니...... 있네... 진짜 없었는데..."


미안했다.

무엇이 남편의 눈을 가린 걸까, 어떤 피해의식과 고정관념이 쌓였기에 열 장이나 걸려있는 빤스도 안 보이게 한 것일까.

십수 년째 자식만 챙긴 내가 원인제공자일까.

아내에게 의존적인 남편이 문제일까.



얼마 전 인근 고등학교에 수업을 갔다.

수십 개의 강좌를 개설한 뒤 학생 개개인이 듣고 싶은 수업을 선택해 듣는 학교자율과정 프로그램이었는데 디베이트도 1학년, 2학년 강좌를 개설하게 됐다. 신청자가 많았던 1학년에 비해 2학년은 신청자가 6명뿐이었다. 저조한 인원 때문에 걱정이 된 담당 선생님은 폐강 여부를 내게 물어왔다. 6명이면 토론 실습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폐강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교육자원봉사로 가는 수업이라지만 디베이트가 좋아서 신청한 학생들을 인원이 적다는 이유로 내치기는 힘들었다.


"그런데요 강사님. 그 여섯 명 중에 한 명이 꽤 힘든 아이예요. 평소 수업시간에도 엉뚱한 말을 많이 하고 돌아다니거나 나가서 안 들어오는 일도 다반사고요. 너무 힘드실 것 같은데 어쩌죠?"

선생님은 이후에도 같은 우려를 여러 번 하셨다. 강의 당일에는 여러 선생님으로부터 똑같은 우려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나를 모르는 다른 강좌 선생님들마저 나를 딱한 눈으로 쳐다봤을 정도.

도대체 어떤 학생이길래 이렇게 악명이 높을까 걱정이 됐지만, 내 디베이트 강의의 경험치가 올라가겠거니 생각하며 교실문을 열었다.


선생님들이 미리 일러준 이름 때문에 그 학생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3시간 동안 이어진 수업 내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디베이트가 뭔지 너무 궁금해서 신청하게 됐어요."라고 신청 이유를 말한 학생은 중간중간 던지는 내 질문에 적극적으로 답하였고 입안문도 열심히 썼으며 무엇보다 디베이트 실습에서 입안을 맡아 충실히 수행했다. 교차질의 때 상대를 향해 질문을 던지기도 했으며 수업이 끝난 후 소감 발표까지 마쳤다. 가끔 엉뚱한 말을 해서 주변 친구의 야유를 받았지만 내가 듣기에는 꽤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의도를 헤아려 다시 풀어 이야기해 주면 "제 말이 바로 그거였어요!"라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날 봤고, 주변 아이들은 당황하며 그 학생을 다시 쳐다보았다.


일회성으로 강의를 한 내가 그 학생의 모습을 다 안다고는 전혀 말할 수 없지만 선입견, 고정관념이 없는 외부강사의 눈에 그는 그저 평범한 학생일 뿐이었다. 외부인에게까지 평소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가면을 썼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도 그의 모습일 것이다.

하마터면 고정관념으로 한 학생을 놓칠 뻔했다. 남편이 빤스를 보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과연 누가 문제일까.

고정관념에 휩싸여 눈앞의 실체를 놓치는 이일까.

상대가 눈에 보이는 것도 외면하고 부정할 만큼 오랜 기간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든 장본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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