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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ul 07. 2023

나비사랑초처럼 살자

종일 후덥지근하더니 간밤 내내 장맛비가 내렸다. 발바닥이 마룻바닥에 척척 들러붙어 걸음마다 짜증이 올라왔지만 빗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달랬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듯, 비 온 김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식물들에게 화학처리된 수돗물 대신 자연 물세례를 실컷 해주고 싶었던 것. 베란다 창문을 최대치로 열고 그 앞에 화분들을 몰아 놓았다. 비를 가장 잘 맞을 수 있는 명당에는 나비사랑초를 놓았다. 요즘 나의 애정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녀석이자 가장 기특한 녀석이다.


동네친구가 일회용 컵에 임시로 심어 나비사랑초 줄기 몇 가닥을 준 것은 지난해 봄이었다. 이파리 모양이 나비 같기도 하고 하트 모양 같기도 해서 나비사랑초라 불린다고 했다.  번듯한 빈 화분에 옮겨 심고 물주며 가꾸었더니 처음 받았을 때보다 제법 풍성하게 싹을 틔우고 연보라색 꽃도 만들어냈다. 이름대로 나비가 베란다 가득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 가을부터 시들시들해졌다. 사계절 내내 잎과 꽃을 볼 수 있는 다년생 식물이라고 했거늘 겨울이 되자 작은 잎 두 개만을 남기고 겨우겨우 목숨을 붙들고 있었다. 물을 너무 자주 많이 주면 과습으로 죽는다는데, 너무 안 주면 말라죽을 텐데, 영양제라도 뿌려줘야 하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봄이 됐다.


"아깝더라도 줄기를 싹둑 잘라주세요. 그러면 더 풍성하게 새싹이 올라올 거예요."

아파트 장에 오는 화원 사장님의 조언이었다. 두 가닥 남은 줄기를 다 자르라고? 멀쩡한 애들의 목을 치라니... 마음이 아팠지만 전문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작은 화분이 세상에서 제일 크고 황량한 불모지로 변했다.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나라는 죄책감과 친구가 준 식물을 채 1년도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올라왔다. 하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흙뿐인 화분에 가끔씩 물을 주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화분에는 자주색 나비가 넘쳐났다. 남아있는 땅이 더 있을까 싶은데 여기저기 구석구석 빈틈없이 새싹이 돋아났다. 매일 아침 눈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나비사랑초가 하룻밤새 또 얼마나 자랐나, 새싹이 몇 개나 움텄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집안에 사랑이 넘쳐나나 보다~ 그러니 식물이, 나비사랑초가 잘 자라지~"

근거가 없는 줄 알면서도 동네 친구의 덕담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매일 나비사랑초를 들여다보는데 문득 멀리 사는 친구 생각이 났다. 직장일도 너무 힘들고 아내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며 고달픈 인생을 토로하던 녀석. 남은 인생은 오로지 책에 파묻혀 살겠다며 연락을 두절한 녀석이다. 가끔 SNS에 책 표지 사진을 올리는 것으로 생존신고를 하는 대학 동기에게 나비사랑초를 보여주고 싶었다.


불모지를 자줏빛 이파리로 빽빽하게 채운 데에는 땅밑을 비밀스럽게 가득 채운 구근의 힘이 컸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단단한 구근은 겨우내 봄볕과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침묵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때로는 만개하며

과거의 추억과 영광에 매몰되지도 않고

허황된 미래에 매달리지도 않고

그저 오늘, 충실히 싹을 틔우는

나비사랑초.


그렇게 살자 친구야.

현재의 고통이 영원하지 않음을, 현재의 영화 역시 영원하지 않음을,

너에게도 때를 기다리는 단단한 구근이 있음을...

그리하여 곧 충실히 행복할 것임을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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