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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Aug 19. 2023

순수혈통만 가능한 헌혈

주말 아침부터 서둘러 움직였다. 10시 30분에 예약한 헌혈 시간에 맞추려면 평소 같은 여유로운 토요일 아침은 포기해야 했다. 아르바이트 가는 아이들의 아침식사를 챙기고, 빨래를 널다가 베란다에 굴러다니는 먼지를 외면 못해 물청소를 하고 나니 시간이 빠듯했다. 차는 둘째가 타고 나갔으니 마을버스를 타야 하는데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 근처에 주차된 전동 바이크로 뛰어가 QR을 찍고 페달을 밟았다.


땡볕에 선글라스도 안 낀 눈은 부시고 땀은 온몸에서 줄줄 흘렀지만 바람을 가르며 쌩쌩 달리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지금 헌혈을 하러 가는 중 아니던가. 헌혈이 나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 머릿속으로 정리해 가며 흐뭇함 지수 100을 채우기까지 했다.


헌혈은 나에게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첫째, 정신적 영향

헌혈은 내가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도움 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안겨준다. 나눔에는 물적 기부, 인적 기부(봉사), 생명 나눔의 형태가 있는데 그중 나는 봉사와 생명 나눔 두 가지를 실천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할 수 있는 만큼 사회에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이 삶의 만족도를 높인다. 일석이조의 효과가 아닐 수 없다.

둘째, 육체적 영향

헌혈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전혈의 경우, 320mL 헌혈은 만 16세 ~ 69세, 400mL는 만 17세 ~ 69세만 가능하며 남자 50kg 이상, 여자 45kg 이상이 되어야 한다. 혈압은 수축기 혈압 90mmHg 미만 또는 180mmHg 이상, 이완기 혈압 100mmHg 이상, 맥박은 1분간 50회 미만이나 100회 초과, 체온 37.5°C 초과 시 헌혈이 제한된다. 사전문진을 통해 복용하는 약, 건강상태등에 따라 제한되는 경우의 수가 늘어난다. 게다가 여성의 경우 철분수치가 낮은 경우가 많아 입구컷 당하는 경우가 많다. 혈색소 수치가 성분헌혈은 12.0g/dL 이상인 경우, 전혈 헌혈은 12.5g/dL 이상인 경우 헌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헌혈이 가능하다는 것은 건강한 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헌혈이 하고 싶다면 평소에 몸을 건강하게 가꾸어야 한다. 꾸준히 성실하게. 잘 먹고 잘 쉬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 기본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 경제적 영향

헌혈을 하면 보상이 주어진다. 예전에는 우유 한팩과 초코파이 하나였지만 지금은 간식 외에도 바리바리 챙겨준다. 헌혈을 하는 동안 읽어보라고 주는 안내문에는 헌혈로 받을 수 있는 다양한 부가혜택이 정리되어 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주로 편의점 상품권, 영화예매권, 문화상품권, 지역상품권등을 준다. 수시로 이벤트도 진행 중이어서 언제 헌혈을 하러 가느냐에 따라 더 많은 혜택이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헌혈 후 받는 헌혈증서를 수혈이 필요한 경우 의료기관에 제시하면 수혈 비용 중 본인 부담금을 면제받을 수 있다. 또한 필요한 사람이나 혈액원에 기증할 수도 있다.


이렇게 룰루랄라 즐거운 마음으로, 땀 한 바가지 흘려가며 벌게진 얼굴로 15분 만에 도착했는데, 못했다. 혈색소수치가 11.9g/dL여서 전혈이든 성분헌혈이든 불가능하다고 했다. 미안한 마음 가득한 얼굴로 잠깐 쉬었다 가시라 말하는 직원분을 뒤로하고 서둘러 헌혈의 집을 빠져나왔다. 너무 창피했기 때문이다.


부끄러웠다.

헌혈이 가능한 몸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나의 음흉하고 사악한 속내였다. 그 검은 마음이 핏속으로 고스란히 녹아들어 순수했던 내 피가 오염됐다며 자책했다. 오염된 피로 인해 혈색소수치가 낮아져 헌혈 금지라는 철퇴가 나에게 가해졌다는 과대망상에 헛헛하게 웃었다.

바람을 가르며 숨 가쁘게 달려간 내막에는, 이번 주말까지 헌혈을 하면 영화예매권을 1+1으로 준다는 프로모션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욕심, 예약을 하고 방문하면 쿠폰에 도장을 두 개나 받을 수 있어서 문화상품권을 추가 증정받을 수 있다는 셈이 있었던 것이다.


아침부터 헌혈하겠다며 서둘러 나가는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던 남편은,

작년 1월부터 프로모션 상관없이 성실하게 헌혈을 하고 있는 남편은,

헌혈 후 받은 5천 원짜리 문화상품권에 만족하며 그걸로 수험서를 사는 남편은,

아주 당당하게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

"당신 몰랐어? 헌혈하러 가면 헌혈자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 대가에 눈이 먼 사람인지 알아보는 기계 있잖아. 그거 통과해야 헌혈할 수 있어. 당신처럼 프로모션에 눈먼 사람은 딱 골라내게 돼있지. 헌혈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다시 오늘부터 몸과 마음을 헌혈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야겠다. 순수혈통을 가진 사람이 되어 당당히 다시 도전하리라...

헌혈 후 기념품을 받는 대신 그 금액만큼 기부를 하는 '헌혈 기부권'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아직은 헌혈 후 받는 보상의 기쁨을 조금 더 누리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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