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Aug 30. 2023

후다닭 여행

갑자기 떠난 대만 여행 첫날

- 여행 결정. 갑자기! -

갈래? 갈까? 가자!

그 세 마디로 결정됐다. 방학 내 방바닥만 긁고 있는 딱한 스무 살을 구제하기 위한 여행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코로나로 몇 년 간 묶였던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던 나의 욕망이 컸다. 작은 아들과 나는 '8월 22일부터 25일까지'라는 기간 외에는 어떠한 것도 결정하지 않고 어디든 떠나고 보자는 데만 합의를 했다. '3박 4일 동안 다녀올 수 있는 곳, 비행시간이 길지 않은 곳, 일본이 아닌 곳, 한 번도 안 가본 곳'이라는 조건에 맞는 곳은 많지 않았다. 휴양보다는 도시 탐방과 맛집 투어에 무게를 두고 고르다 보니 '대만'이 당첨됐다. 여행지 결정은 17일 오전, 비행기 티켓과 호텔 예약은 17일 오후에 했다. 돈이 없지 비행기표와 호텔방이 없지는 않았다.


비행기표와 숙소를 정해 예약하는 것은 내가, 3박 4일 동안의 일정을 짜는 것은 작은 아들이 맡았다. 비용도 그렇게 나눴다. 비행기표와 숙박비를 제외한 일체의 경비를 작은 아들이 준비했다. 주말마다 열심히 쌀국숫집 서빙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한 달 반치 월급을 한입에 털어 넣는 것을 꽤나 아쉬워했지만, 돈은 그러려고 버는 거라며 살살 꼬드겼다.


자격증 시험을 70일 앞둔 남편과 아르바이트로 바쁜 큰 아들은 집에 남았다. 남편은 대만 몇 번 갈 돈 모아 나중에 유렵에 가겠다고 했고 큰 아들은 연말에 나 홀로 여행을 떠나겠노라 했다. 그러니 이번 여행을 나와 작은 아들 둘만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21일 밤, 짐을 쌌다. 두 식구의 3박 4일 짐은 단했다. 혹시 뭘 사 오게 될지도 모르니 조금 큰 가방을 가져가자고 한 게 24인치 여행가방. 그마저도 반밖에 차지 않았다.

"수영복 챙길까? 호텔 수영장 괜찮던데?"

"에이... 내가 애도 아니고 엄마랑 둘이 가서 수영장 가는 거 별론데?"

수영복 없이 해외여행 간 것도 처음이었다. 그저 각자 갈아입을 옷 세 벌씩이 전부인 짐.

남은 가족을 위해 사골국이나 카레도 해놓지 않았다. 각자 알아서 저녁식사 해결하고 들어오라고 당부했다.

"걱정 마. 가스레인지를 켤 일도 전혀 없을 것 같아."

남편과 큰아들은 침대와 화장실만 이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남겨진 가족에 대한 부담도 전혀 없는 여행 역시 처음이었다.


공항 가는 길은 역시나 설렜다. 오래간만에 맡은 공항, 비행기 냄새만으로도 행복했다. 예전엔 면세점에서 사고 싶은 물건이 많았는데 물욕이 없어진 건지, 경제관념이 생긴 건지, 전혀 관심이 안 생겼다. 떠난다는 그 기분만으로 이 여행은 끝났다 싶었다.


- 대만에 도착! -

대만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시내로 갈 교통편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당연히 지하철을 타고 갈 생각이었는데 작은 아들이 도발을 했다.

"자동차 렌트할까?"

낯선 땅, 언어도 낯선 곳에서 렌트를 할 용기가 어디서 나는지 궁금했다.

"어차피 난 운전경력 반년밖에 안 된 초보잖아. 한국이나 대만이나, 처음 가는 길이 낯설기는 마찬가지야. 그러니 여기서 운전한다는 게 나한테는 전혀 두려운 일이 아니야."

겁내는 건 오히려 운전경력 27년의 나였다. 다행히, 운전면허 뒷면에 영어로 새겨진 국제면허로는 대만에서 운전이 안된다는 정보를 입수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여행이고 뭐고 긴장 속에서 진땀 좀 뺄 뻔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나는 무더운 날씨인데 말이다. 아... 렌트했다면 여행 내내 시원하긴 했겠구나...


- 뚜벅이 시작! -

교통카드를 사서 충전해 타이베이 메인 역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본격적인 뚜벅이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첫날 묵을 숙소를 타이베이 시 외곽 작은 어촌 마을의 민박으로 잡아놓은 터라 타이베이 메인 역에서 다시 교통편을 알아봐야 했다. 버스를 타려고 밖으로 나갔는데 갑자기 세찬 비가 쏟아졌고 정류장까지 한참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편의점에서 우비를 사 입었다. 날은 푹푹 찌는데 우비까지 입으니 둘 다 땀범벅이 됐다. 그 와중에,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그새 날이 개어 주섬주섬 우비를 벗어 가방에 욱여넣어야 했다.


버스를 타러 걸어가려는데 구글 맵을 한참 들여다보던 아들이 말했다.

"어? 좀 이상한데? 버스 정류장이 좀 이상해. 우리 숙소 가는 버스는 몇 정거장 가서 또 갈아타야 하는데 경로가 어딘지 모르게 비효율적인 것 같아. 다시 역으로 돌아가야겠어."

타이베이 메인 역으로 들어가 외곽으로 가는 기차표를 구매하면서 아들은 의기소침해졌다.

"우리가 너무 대책 없이 여행 왔나 봐. 이렇게 가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

자기만 믿고 따라오는 엄마 앞에서 꼴이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우리 가족은 늘 남편이 치밀하게 짜놓은 여행 계획표에 따라 여행했었다. 몇 시에 어디에서 무엇을 타고 출발하며 식사는 어디에 위치한 무슨 식당인지, 그날의 날씨예보에 따라 옷차림은 어때야 하는지 꼼꼼하게 계획한 남편. 그의 옷 끝자락만 움켜쥐고 따라다니면 됐었다. 이렇게 계획 없이, 정처 없이 떠나는 여행을 남편은 극도로 싫어했다. 새벽에 일어나 가방 지고 나가 늦은 밤까지 일정에 맞춰 빡세게 움직이는 게 여행이라고 했다. 우리의 여행에 남편이 따라왔다면 얼마나 투덜댔을까. 게다가 날씨도 남편이 딱 싫어하는 고온다습.


우리 둘에게 이번 여행은 도전이자 일탈이자 해방이었다. '숙소에는 오늘 안에만 가면 돼~ 이런 게 여행이야~ 지금 우리는 아주 잘하고 있어~'라고 서로를 다독이며 길을 재촉했다. 40분가량 기차를 타고 이동해 시골 마을 작은 역에 내린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작은 어촌으로 들어갔다. 지쳤지만 즐거웠다. 어쨌든 여행은 신나는 거니까.


- 아찔한 첫 숙소 -

우리가 찾아간 곳은 패키지여행코스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지우펀'이라는 관광지였다. 관광객이 많아 '지옥펀'이라고도 불린다는데 다행히 우리가 간 날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구불구불 작은 골목길을 따라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 숙소를 찾았다. 호텔이랄 것이 없는 동네라서 에어 비앤비로 예약한 곳인데,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고 같은 자리에서 뺑글뺑글 맴돌다 겨우 숙소를 운영하는 음식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음식점에서 서빙을 보던 작은 체구의 아주머니가 너덜너덜한 연습장에 적혀있는 내 이름을 가리키며 이 이름이 너냐고 눈짓으로 물었다. 다행히 예약이 되긴 된 모양이었다. 카운터에서 키 하나를 뽑아 들더니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앞장서서 가는 아주머니의 담배연기가 뒤따라 가는 우리 얼굴을 때렸다. 좁고 지저분하고 으슥한 골몰길을 돌고 돌아, 이렇게 멀리 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우리를 데려갔다. 그러더니 가파른 계단을 한 번 두 번 세 번 데리고 올라갔다. 뒤쫓아 가는 이 상황이 너무 웃겨 우리 둘은 연신 킥킥댔다. 홍콩 누아르 영화에 나오는 뒷골목, 상대 조직의 보스를 만나러 가는 길 같기도 하고 은밀한 거래를 하러 가는 길 같기도 했다. 이윽고 도착한 숙소는 사진에서 본 그대로였다. 시내에 있는 호텔만큼은 아니었지만, 현관문 위 벽에 도마뱀 두어 마리가 진을 치고 있었지만, 에어컨이 밤새 말썽이어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지만, 욕실과 침구가 깨끗했고 지친 몸 뉘일 침대가 있으니 그 정도면 훌륭했다.


- 두 마리 닭의 닭질 여행 -

대만에 도착한 게 낮 2시, 숙소에 도착한 게 저녁 7시였다. 꼬박 다섯 시간 걸려 숙소에 도착하느라 우리가 걸은 걸음수는 15000보였다.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에 옷은 땀에 절고 쫄쫄 굶어가며... 닭질도 이런 닭질이 없지 싶었다. 그런데, 꽤 마음은 잘 맞는 닭들이라서 고생 역시 여행의 재미 아니겠냐고 깔깔거렸다.


남편과 큰아들은 둘만의 만찬을 만끽 중이라며 배달시킨 음식 사진을 보내왔다. 매콤한 주꾸미볶음에 소주. 우리는 더 맛난 거 많이 먹었다며 허풍을 떨어야 했다. 숙소에 딸린 음식점에서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볶음밥과 그보다 더 맛없는, 냉동만두 같은 딤섬을 저녁으로 먹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맛이었다. 하지만 대책 없이 만만하게 떠난 여행의 말로라고 자책하기에는 온갖 돌발 재미가 가득한 하루였다. 게다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을 것 같은, 지우펀의 명물 땅콩아이스크림을 맛본 것만으로도 고단한 하루에 대한 보상은 충분했다.


이 뷰에 반해 예약한 숙소. 발코니 풍광이 예술이다.



갑자기 떠난 아들과의 여행.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기록으로 묶어둡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순수혈통만 가능한 헌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