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Sep 21. 2023

공부를 방해하는 검은 세력

남편의 두 번째 합격증이 날아왔다.

작년에 경영지도사 시험에 최종합격한 이후 공부에 더 불이 붙기 시작하더니 가맹거래사 시험에도 최종합격한 것이다. 두 번째 자격증 2차 시험을 준비하며 동시에 세 번째 자격증 시험인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한 남편은 작년, 1차 시험에 합격했다. 지금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공인중개사 2차 시험 준비 중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공부에 중독된 게 아닐까 의심된다.


시험 보는 꿈을 꾸느라 잠을 못 이룬 날, 남편은 일어나자마자 새 수험서를 주문했다.

그날의 목표한 공부량을 채우기 위해 근무시간 전후 틈틈이 도서관과 스터디카페를 오갔다.

주말에는 도서관에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7시 전부터 집을 나섰다.

코로나로 모임과 회식이 줄어든 덕분에 물리적인 시간 확보가 쉬웠다.

3년간 자격증 두 개를 획득한 비결이다.


하지만 수험생의 길이 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안정적인 공부리듬을 탈 무렵마다, 이제 피치를 올려볼까 의욕을 불태울 때마다, 남편에게는 돌발 상황이 생겼다. 아픈 직원들은 왜 그리 많은지... 외식업계에 종사하는 남편은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주방이든 홀이든 종횡무진 뛰어다녀야 했다. 그런 날은 공부고 뭐고 집에 오자마자 쓰러졌다. 중고등학교 시험기간에는 도서관이든 스터디카페든 자리 잡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시간 확보, 자리 확보와의 싸움을 하다 보면 공부 의욕이 꺾였다. 그러면 떨어졌던 공부 의욕을 올리는 시간이 또 필요했다. 그렇게 지난 3년 반을 버텼다는 것, 소기의 성과를 올렸다는 것. 대단한 일이다.


세 번째 자격증 2차 시험을 세 달여 앞둔 시점부터 남편의 공부시간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다.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한 어머니를 토요일 오전마다 재활병원에 모시고 다녀와야 했다.

한여름 도서관은 공공기관 실내 설정온도 제한으로 인해 찜통이었다.

큰아들이 쓰던 아이패드를 군입대로 빌려 쓰고 있었는데 제대와 복학으로 다시 돌려줘야 했다.

중고로 구매한 아이패드는 배터리가 채 두 시간을 못 버텼다. 중고로 되팔고 아들이 쓰던 아이패드를 돌려받았다. 그러느라 또 며칠을 공쳤다.

가맹거래사 자격시험 합격자를 대상으로 10월부터 7주에 걸쳐 110시간의 실무 연수가 있다며 남편은 체념한 듯 말했다.

"내 공부를 방해하는 검은 세력이 있는 게 분명해!!!"

짜증이 극에 달한 남편은 공부를 막는 모든 장애물이 어떤 보이지 않는 세력의 방해공작이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 남편의 직장 동료 한 명이 코로나 후유증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4살짜리 어린 아들과 아내를 남겨둔 30대 초반 가장의 죽음은 남편의 공부뿐 아니라 일상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후로도 지인 부모님들의 부고가 잇따랐고 매주 장례식장을 방문해야 했다. 가까스로 버티며 사는 50대 초반 가장의 여리디 여리고 가느디 가는 정신줄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옆에서 보고 있자니 때로는 위태로워 보여 불안했고 때로는 속상했다.


갱년기 우울증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방편이 남편에게는 공부였다고 생각한다. 잡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적당히 기분 좋은 긴장감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큰돈 들이지 않고 성취감까지 누릴 수 있는 좋은 취미였다. 덕분에 몇 년을 잘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연이은 악재로 공부를 못하는 현실이 검은 세력의 음모론을 낳았다. 공부를 못하는 이유를 만들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 것 같았다.


하지만 남편은 이내 정신을 다잡았다. 확실히 공부할 수 있는 날이 언제인지, 남은 한 달 동안 시간을 어떻게 쪼갤 수 있는지를 계산하고 계획한다. 작금의 현실은 검은 세력의 음모가 아니라 그저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삶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리라.


누군가의 아픔, 누군가의 죽음, 예기치 못했던 여러 돌발상황, 어느 날 갑자기 쏟아지는 졸음, 끝을 모르겠는 나태, 근원을 모르겠는 우울감, 이 모든 것은 그저 생을 사는 사람이라면 으레 마주하는 것임을... 그러니 다시 펜을 들어 밑줄을 긋고 필기를 하며 공부하는 것만이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임을... 그러다 보면 갱년기도 끝나고 생의 무게도 끝나는 날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리라...


* 대문 사진 : 남편이 들고 다니던 암기 노트

매거진의 이전글 박하지 효자 설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