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 전부터 참여하고 있는 청소년 토론프로그램이 있는데 최근 그 조직에 위기가 닥쳤다. 저조한 학생모집과 운영위원들 간의 소통 부족등으로 생긴 작은 균열이 점점 큰 갈등으로 격화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교육 판에 토론문화를 정착시키고 30년 후 대한민국을 이끌 리더를 육성한다는 야심 찬 목표에 감화돼 동참한 일이지만 어쩐 일인지 일이 즐겁게 돌아가지 않았다. 학생들과 함께하는 수업은 즐거웠지만 조직이 돌아가는 모양새는 맘에 들지 않았다. 모두의 성장을 도모하고자 모였지만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갈등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참여했던 코치 한 분이 하차를 선언했다. 처우에 대한 불만, 소통 단절에 대한 아쉬움보다 더 큰 이유는 변화에 대한 기대 포기였다. 아무리 애써도 이 조직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코치님이 내게 말했다.
"송쌤도 잘 판단해서 결정하세요."
조직을 원점에서 재검토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여러 번의 회의 끝에 개편한 조직을 이끌 새로운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내게도 결심이 필요한 순간이 온 것이었다. 이 조직에 남아 적극적으로 운영에 가담할 것인지, 위태로운 조직을 등지고 내 갈길을 갈 것인지.
머릿속이 시끌벅적하던 그 순간에 운명처럼 만난 책이 <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 >이었다. 예루살렘에 위치한 살렘 칼리지의 총장이자 스탠퍼드 대학교 후버연구소의 연구원, 미국의 경제학자로 노벨상을 수상한 러셸 로버츠의 따끈따끈한 신간. 부제는 더 찰떡이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법"
영어 원제는 < Wild Problems >인데 책에서는 이를 '답이 없는 문제'라고 표현했다. 저자는 인생을 살아가며 수시로 마주하는 답이 없는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하는 것이 더 나은지에 대해 알려주겠다고 말을 걸어온다. 귀를 쫑긋,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운명의 볼모가 되지 않기 위해 늘 측정하고, 비교하고, 견준다. 이성의 저울질은 우리의 본성이지만, 아무리 치밀하게 계산해도 버그는 발생한다. ( p36 )
종이에 열십자를 그리고 왼쪽에는 장점, 오른쪽에는 단점을 쭉 나열해 본다.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게 어떤 결정을 내리기 힘들 때 머릿속에 부유하는 생각을 도식화해 보면 왠지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혼, 출산, 취업, 이직등 인생에서 중차대한 결정들 앞에서는 위대한 과학자, 작가, 철학자들도 별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결혼에 대해 다윈은 '비용 대비 혜택 분석 목록'을 만들었으며 프란츠 카프카도 일기에 결혼의 장단점을 써 내려갔다. 결혼의 장점과 단점 목록을 나열해 놓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무엇을 얻게 되는지를 저울질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답이 없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 합리적인 툴 같은 건 없다고 이야기한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최선의 선택을 내리고자 하는 여러 시도는 효과적이지 못하다. 우리의 삶은 일상적으로 느끼는 순간의 쾌락과 고통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마음속에 이미 답을 정해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수학자 피트 하인의 시 <심리학적 팁 하나>를 인용해 '합리적 선택'이라는 통념을 일갈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면, 동전을 던지라. 일단 동전이 돌기 시작하면, 내가 지금 어느 쪽의 결과를 바라고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선택의 결과는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없다. 다만 그 결과마저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신기한 것은, 합리적이며 이성적이라고 알려진 인간이지만 늘 편안하고 안정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진흙탕길, 돌길을 기꺼이 선택하는 이유는 뭘까. 저자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쾌락보다 고통을 더 많이 불러오는 일을 선택하는 게 어떻게 합리적일 수 있을까? 기쁨이나 즐거움보다 괴로움이나 가슴앓이가 더 클 수도 있는 길을 대체 누가 선뜻 선택할까? 대체 누가 가슴앓이와 불안을 자청할까? 인간이다. (p94)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기 때문에 행복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선택을 한다는 것이 공리주의적 관점이지만, 사실 인간은 굉장히 비합리적, 비이성적이다. "어떻게 그런 결정을?"이라고 생각할 만한 선택을 기꺼이 하기도 하는 게 인간이다. 정답이 없는 문제들에 대해 자신만의 감각과 믿음으로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으로 점철된 삶에 대해 더 큰 기대를 품는 것도 인간이다. 때로는 처참한 결과 앞에서 절망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고자 애쓰는 것 역시 인간이다.
책은 제목과 달리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먼저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책을 열심히 읽어보아도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 훨씬 많다고 말한다. 같은 길도 누군가에게는 가시밭길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꽃길이 될 수 있는 법. 따라서 존재하지도 않는 옳은 결정을 하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애쓰지 말고 그저 직접 경험해 보라고 말한다. 그래야 미래를, 삶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디베이트 코치로서, 합리적 선택을 위해서는 일상에서 늘 디베이트를 하라고 강조해 왔다.
"인생은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라고 사르트르라는 철학자는 말했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무수히 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두 명의 '나'가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며 주장을 펼치면 우리는 둘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고 어떤 선택을 하는 게 나에게 더 만족감을 주는지, 어떤 것이 나에게 더 이익인지를 따져볼 수 있습니다. 디베이트를 배우는 궁극의 이유입니다."라고.
이제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이려고 한다.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은 당장 눈앞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결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더 내 심장을 뛰게 하는지, 무엇이 더 나를 성장시킬 것 같은지, 어떤 결정이 내 삶을 더 풍요롭고 의미 있게 만드는지를 고려하는 것입니다."
갈림길 앞에 선 나를 본다.
조직에 대한 섭섭함으로 하차를 결정한 이의 조언을 흘려듣지 말고, 그가 나보다 먼저 경험한 결과를 진지하게 고려해 내 선택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지 모르는 조직에 대해 기대를 품고 그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보며 성공 혹은 실패의 경험을 직접 해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