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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an 11. 2024

감사하며 여유롭게

< 나의 감사는 늙지 않아 - 정연홍 >

고상하고 우아하게.

그렇게 나이 들고 싶었다. 적당히 근육이 붙은 날씬한 몸매와 관리받아 탱탱한 얼굴은 필수다. 헤어스타일은 꼬불거리는 파마머리가 아니라 볼륨이 굵직하게 잡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아해 보인다. 명품까지는 아니더라도 알만한 브랜드로 잘 차려입어야 하며, 그래! 적어도 백은 명품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경제적 여유는 필수겠지. 앞으로 20여 년 동안 준비하면 그런 노후를 맞이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고상하고 우아한 노후를 꿈꾸면 마음이 바빠졌다. 이미 나는 '지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인데, 거기에 더 채찍질를 하게 됐다. 아무 소득 없이 떠도는 날이면 불안하고 집에 있는 날은 더 초조했다. 고상하고 우아한 미래를 꿈꾸면 꿈꿀수록 나의 오늘은 서글퍼졌다.


정연홍 작가님의 <나의 감사는 늙지 않아>는 그런 나의 손을 꼭 잡아주는 책이었다. 표지에 그려진 작가님의 환한 얼굴이 나를 지그시 쳐다보며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지금도 충분히 멋져. 그렇게 애쓰지 마."


누구나 다 마시는 커피 한 잔,
누구나 다 하는 자식 자랑,
누구나 좋아하는 간식 시간,
누구나 원하는 낮잠.
자랑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함이 모여
웃음이 되고 오늘을 꽉 채워 준다.
(91쪽)

  

이 문장에 이르자 나의 계획이 한없이 막연하고 무모하게 느껴졌다. 명품으로 치장하고 풍성하게 볼륨을 살린(속된 말로 후까시가 들어간) 헤어스타일이 나를 고상하고 우아한 사람으로 보이게 해 줄까. '고상하고 우아하게'라는 건 순전히 밖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던가. 고상하고 우아해 보이는 나는, 행복할까.



저자의 일상은 평범함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늘 웃는다. 그 평범한 것들의 소중함을 알고 늘 감사한 마음이 일렁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을 할 수 있는 건강한 몸, 일을 하며 더 건강해지는 몸에 감사해한다. 손길이 닿아 깨끗해지는 당신의 일이 즐겁고 고맙단다. 나이 칠십이 넘었어도 화장품 선물을 받으면 설레는 감성을 갖고 있는 사람, 손녀와의 약속을 지키기보다는 딸의 눈물을 덜어주는 것을 선택하는 솔직한 엄마, 젊음이라는 무기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 부럽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음에 행복해하는 할머니. 어느새 그녀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똑같은 일인데 마음먹기에 따라 지옥 또는 천국이 된다.
세끼 밥을 차려야 하는 일이 곤혹이긴 하지만,
밥을 차려줄 수 있는 식구가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빨래를 해야 하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지만,
탈없이 돌아가 주는 세탁기가 있어 감사하다.
글을 쓴다고 인생 대박이 나지 않겠지만,
글 쓸 수 있는 튼튼한 손가락에 감사하다.
(21쪽)


막연한 미래를 핑계로 현재를 담보 잡혀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행복할까. 가족에게, 심지어 세탁기에게 감사할 수 있을까. 나의 마음과 몸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까. 왜 그러지 못했을까.


작가님은 늘 자신을 기특하게 여긴다. 나이 칠십이 넘어서도 직장에 다니는 사람, 매일 필사와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향한 감사가 넘쳐나니 삶이 행복할 수밖에 없다.

나이 칠십 넘어 책을 필사하며
내 마음과 행동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
인생이 평화롭다는 뜻이며
아직도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말이다.

글을 쓴다는 게 이렇게 좋은 줄 알았으면
진즉에 시작할 걸 그랬다.
(97쪽)


나도 글을 쓰고 있다.

타자를 칠 수 있는 손가락이 있으며 나만의 노트북을 갖고 있다. 때때로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쓴다. 책도 읽는다. 튼튼한 손가락에 감사하고 글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준 남편에게 감사하다.

강의를 다니고 자원봉사도 한다. 정신없이 바쁜 날도 많지만 한없이 늘어지며 한가한 날도 많다. 나의 노동을 내가 조절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18년째 같은 집에 살고 있어 집이 썩어가고 있다고 투덜대기 일쑤였는데, 안정적인 정주환경으로 가족 모두 별 탈 없이 지내고 있는 18년에 감사하다.

결혼 24년에 벌어놓은 것은커녕 빚만 있다며 방만한 경제관념을 가진 나를 탓하기 바빴는데, 돈걱정이 가장 행복한 걱정이라는 말에 이내 용기를 갖는 해맑은 나에게 감사하다.


평범하고 감사한 날들이 쌓인 나의 노후는 얼마나 여유로울까. 여전히 세상에 감사한 것, 설레는 것이 가득한 이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늙을 수가 없다. 고상하고 우아해 보이는 할머니가 아니라 내 안으로 향하는 감사함과 여유가 충만한 할머니의 표정은 얼마나 밝을까. 그러니 계속 써야겠다. 나의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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