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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Sep 02. 2023

어슬렁거리는 여행

갑자기 떠난 대만 여행 셋째 날

- 대만의 OO -

시먼딩이라는, 대만의 명동이라는 곳에 갔다. 어느 지역이든 소개글을 보면 한국에 빗대어 표현된 곳이 많았다. 대만의 홍대, 대만의 명동, 대만의 OO. 한국인 관광객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라고는 하나 그런 선입견이 온전한 여행을 방해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명동이나 홍대를 거닐어본 기억이 없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게 어디든 핫한 매장이 많다는 점과 소문난 먹거리가 많다는 것이 사람을 끌어모으는 이유일 테다. 이곳도 그랬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 역시 '곱창 국수'와 또! '망고빙수'를 먹기 위해서였다.


한국의 여행 프로그램에도 많이 소개됐다는 곱창국숫집은 듣던 대로 인산인해였다. 테이블이 없어 길거리에 서서 먹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는데, 우리도 그래야 했다. 곱창을 좋아하지 않는 아들 때문에 작은 사이즈로 시켰는데 그마저도 다 먹지 못했다. 더운 날씨에 야외에서 먹는 곱창국수는 국물이 걸쭉해서 빨리 식지도 않았다. 맛은... 국수 사이사이 잘게 썰린 곱창을 곁들여 먹는다는 것 외에는 특별할 것 없는, 가쓰오부시가 잔뜩 들어간 오꼬노모야끼 맛이었다. 빨리 입안을 개운하게 해 줄 그것이 필요했다. '망고빙수'


대만 2대 빙수 맛집이라는 곳에 갔다. 주문을 하자 점원이 어색한 한국말로 외쳤다.

"안에 들어가면 자리 있어요. 기다리면 갖다 줘요."

대만에서의 세 번째 빙수. 역시 생망고였지만 맛이 덜했다. 누군가는 이곳 빙수가 최고라고 했지만 우리에게는 세 군데 중 3위였다. 사람의 입맛이라는 건 꽤나 주관적이다. 여행지를 대하는 마음가짐, 바라보는 관점도 꽤나 자의적이다. 나에게는 시먼딩이 대만의 명동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대만의 시먼딩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 여행은 쉼이다 -

두 번째 행선지는 석양으로 유명한 단수이였다. 지하철의 마지막 종착역이자 대만의 북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석양을 보려면 세 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주변에 볼만한 관광지가 여럿 있어 돌아다녀봐도 좋았겠지만 그러기에는 날이 너무 뜨거웠다. 어느 영화에 나왔다는 고등학교 건물, 대학교 건물, 오래된 요새 등등을 볼 필요가 있겠냐는 아들의 말에 바로 수긍했다. 건설환경을 전공하지만 도시에 너무 관심이 없어서 문제다. 하긴, 관심 있는 분야가 게임밖에는 없다.


석양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있다는 스타벅스 2층 자리 잡았다. 평소 같았으면 석양을 보기에 최고인 자리였음이 분명한데, 마침 건물 외관 공사 중이라 2층 통창 시야에는 인부들이 가득했다. 아들과 나는 그곳에서 꼬박 세 시간을 말도 없이 쉬었다. 마침 옆테이블에는 한국인 세 모녀가 앉았는데 어찌나 하하 호호 수다와 웃음이 끊이지 않던지... 대화 없이 폰만 보며 있는 우리 둘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아들은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죽이는 일을 못 견뎌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도 카페에 가는 일은 누구를 만나 용무를 볼 때뿐. 그러니 우리는 낯선 도시에서 정말로 낯선 쉼을 하는 중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더위도 한풀 꺾인 시각에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해안가를 따라 조성된 산책길을 걷다가 벤치에 앉았다가 다시 걷다가 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둘이 시답잖은 이야기도 하고 문득문득 해가 어느 만큼 내려왔나도 보았다. 뚜렷한 목적지가 없고 시간에 쫓겨 빨리 걷지 않아도 되는 속도의 걸음.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 석양보다 더 좋았다.


- 맛있는 거 다 어디 갔냐...-

석양을 뒤로하고 야시장으로 향했다. 이동할 때 우리는 철저히 분업이 되어있었다. 아들은 구글 지도를 보며 정확한 경로를 파악했고 나는 목적지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맛있는 게 너무 많아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밤 9시쯤 가야 제대로 된 야시장을 만끽할 수 있어요. 길거리 게임이 너무 재미있었어요.'라는 긍정적인 반응부터 '사람에 치어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어요, 바퀴벌레가 너무 많이 보였어요, 바닥이 온통 물천지니 굽이 높은 슬리퍼에 반바지 입고 가세요'등의 부정적 후기까지 모두 확인했다. 크게 기대한다거나 호들갑 떨며 걱정할 필요 없을 정도의 배경지식을 갖고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은 생각만큼 많지 않았고 시장 골목은 깨끗했다. 바퀴벌레나 웅덩이에 고인 더러운 물 같은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길거리 게임은 월미도에서 이미 많이 봤던 것들이었고 저런 건 여자친구랑 같이 와서 해야 재미있다고 아들에게 일러주었다. 먹거리는 풍부했지만 도통 당기는 게 없었다. 닭고기를 넓적하게 펴서 튀긴 지파이 하나를 둘이 나눠먹은 게 전부.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 뭔가 하고 들여다보면 새송이버섯 구이나 탕후루 같은 관심 없는 메뉴였다. 서둘러 시장을 빠져나왔다.


하루종일 곱창국수 하나와 카스텔라하나, 지파이 하나를 둘이 나눠 먹은 게 식사의 다였다. 뭐라도 든든히 먹어야 했기에 24시간 영업한다는 대형매장에 갔다. 완전 조리된 음식이 많아서 저녁으로 먹기 좋다는 후기를 읽었던 터였다. 있었다. 통닭도 있고 닭다리도 있고, 장어도 있었지만 아들과 나의 입맛을 땡기는 게 없었다. 결국 맥도널드 햄버거 두 개와 파인애플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SNS가 발달해 여행지뿐 아니라 맛집, 먹거리에 대해 넘쳐나는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런데 듣고 읽은 대로 똑같이 느껴지는 맛과 감흥은 없었다. 까탈스럽거나 무미건조한 우리 둘에게 셋째 날은 터벅터벅 걷다가 대충 허기나 달래던 일정이었다. 패키지여행이었다면 끼니 하나만큼은 제대로 잘 챙겨 먹었겠지만 우리의 뚜벅이 여행에는 제대로 된 끼니보다 더 그득한 쉼이 있었다.



갑자기 떠난 아들과의 여행.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기록으로 묶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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